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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Nov 17. 2024

겨울의 첫날

 안개비가 내린다. 하얀 연무가 도시를 전부 뒤덮었다. 수리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연한 회색 구름을 보아하니 저녁까지 비가 내릴 것 같다. 창문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닿은 빗방울이 차갑다. 가을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다. 비가 그치고 나면 이제 겨울이 찾아올 것 같다. 강한 바람을 맞은 가로수들은 무거운 낙엽을 털어냈다. 노란 은행잎은 나비 떼가 되어 비바람을 맞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계절은 비와 함께 왔다 가는 손님이다. 봄은 봄비와 같이 찾아오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는 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부드러운 손길로 창문을 두드리는 비는 가을비다. 그리고 겨울로 가는 문이 열리면 차가운 안개비가 마중을 나온다.


 잠든 사이에 가을이 떠났다. 창문을 열자마자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창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날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와 함께 겨울이 찾아왔다. 아침 기온 5도. 초겨울날씨다. 어제 내린 비는 마지막 가을비이자 처음 맞는 겨울비였다. 11월 초에 첫서리가 내렸지만 한낮은 예년보다 따뜻했다. 화창한 가을날을 좀 더 오래 즐기나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이제 영락없는 겨울이다. 후드티 대신에 후리스와 패딩조끼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덜미에 한기를 느끼고 곧바로 후드를 썼다.


 그래도 햇살은 여전히 노란빛이 남아있다. 가을볕은 오래된 다세대주택 단지를 따뜻한 색감으로 곱게 물들인다. 그리운 추억의 색으로 물든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완연한 가을이 되면 청소년수련관 옥상정원을 자주 찾는다.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있어서 동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해 질 무렵 노을빛에 물든 마을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오래된 취미생활이다. 유화물감 같은 가을햇살은 세상을 채색하고 겨울햇살은 사진처럼 본연의 색채를 드러내게 만든다. 맑고 투명한 햇빛은 건조한 공기와 만나면서 자연색을 이끌어낸다. 날은 춥지만 아직은 낭만적인 가을의 색감이 가득하다.


 걷는 곳마다 낙엽이 쌓여있다. 은행잎으로 덮인 길은 햇살을 받아 환한 금빛으로 가득했다. 길 건너 아파트 단지 위로 보이는 하늘은 전보다 채도가 낮아졌다. 바다처럼 깊은 파란색이 연하고 맑은 푸른빛으로 변했다. 몇 주만 지나면 푸르름은 사라지고 겨울철 하늘 특유의 투명함만 남을 것 같다. 올 가을은 작년보다 더 짧았다. 9월 말까지 이어진 늦더위는 10월 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가을비가 여러 번 내린 뒤에야 여름이 남긴 잔열이 식었다. 체감상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가을을 떠나보냈다. 늦은 저녁 풀벌레소리와 같이 다가온 가을은 밤비와 함께 떠났다. 올해도 작년처럼 아쉬움만 남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겨울 옷을 입고 있었다. 춥다는 말이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단골 국밥집은 가게 밖에 절인 배추를 잔뜩 쌓아놨다. 김장을 하려는 모양이다. 내일 새벽이 되면 기온은 영하로 떨어진다. 월동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다. 겨울의 첫날은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한다.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연말 분위기를 떠올리게 된다. 다들 연말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인사처럼 주고받지만 그래도 연말은 연말이다. 겨울기념으로 크리스마스이브를 배경으로 하는 <대정전의 밤에>를 읽고 있다. 짧은 가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을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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