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사람의 삶의 역사를 알아야 하나, 그것은 단시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 사람과 인연이 맺어져야만 그의 삶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잠깐 만나는 사이나, 업무적으로 만나는 사이, 감정선이 없는 의무적인 사이에서는 그의 역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에, 각기 자신과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다르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이기에, 같은 기준과 같은 생각으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상대와 한 번에 친해지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주저하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과의 돈독함은 서로의 역사가 쌓여야만 두터운 관계와 신뢰가 가능하다. 김창욱 강사는 말한다.
"이런 사람을 곁에 두셔야 해요. 삶으로 말하는 사람이요. 꼭 뭘 하라고 지시하거나 그렇게 말하시는 분보다 삶이 말하는 사람을 두세요. 언어는 본질이 아니에요. 마음이 본질입니다. 마음이 편하고 통하는 사람을 곁에 두세요."
"삶이 말하는 사람"을 옆에 두라는 말에 공감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의 말보다 행동이다. 옳은 삶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그 삶을 보면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똑똑한 교육이다.
상대의 마음을 알기까지 우리는 언어에 현혹된다. 마음은 그 사람의 역사이다. 마음은 삶에 담겨 있고, 그 삶을 안다는 것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과의 두터운 시간들 속에서 여러 상황들을 겪어야만 그를 알고 이해할 수 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업무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의외로 서로에게 통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회사라는 곳은 목적의식을 갖고 만나는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도 마음이 오고 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목적을 갖고 만나는 회사다 보니 서로의 마음보다는 언어로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면서 시간의 축척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삶으로 마음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들어온다. 그런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 속에서 시행착오가 생긴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동안 오해도 있고 실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의 삶과 역사를 알게 되고 살아온 시간의 모습들을 이해하게 되면 서로의 관계는 신뢰가 되고 언어는 그들에게 유희가 된다.
언어는 편안함의 표현일 뿐 마음은 이미 서로에게 전달되어 있다. 어머니의 "밥은 먹었니"라는 언어는 밥이 본질이 아니라 '자식이 잘 지내는지'의 궁금증이고, '보고 싶은 마음'이 담긴 언어유희이다. 삶이 언어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진심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간직한 진심들이 너무 고맙고 그들의 삶이 너무 좋아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목적의식을 갖추고 만나는 어색한 관계는 불편하다. 그런 관계 속에서는 서로가 존재하지 않고 목적만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목적보다 시간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런 역사가 존재하기에 그들에게는 삶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삶을 이해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모든 순간을 볼 수는 없지만 이 세상에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축복받은 사람이다.
서로의 삶을 나누면서 삶이 서로에게 말이 될 때, 그들에게 언어는장난감이 되고 삶 자체가 언어가 되어진다.
나는 '삶이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상대의 삶과 역사를 알아가며 그들의 시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해 간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과정이다. 상대의 모든 시간들을 알 수 없지만 서로의 진심이 통할 때 그들의 삶 자체가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