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앉아 있는 날

단편

by 박동욱

며칠 만에 몸과 마음이 다시 편해졌다. 몸이 한결 가볍고, 머리도 또렷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손끝이 낯선 감각이었다. 예전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면 문장들이 금방이라도 흘러나왔는데, 오늘은 모든 문장이 허공에만 맴도는 기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거다. 걸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냥 내일 잘하면 되지.”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좋은 컨디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지켰다.
커피는 점점 식고, 모니터 속 커서는 묵묵히 깜빡였다.
무엇을 쓰고 싶은 마음은 분명했지만, 막상 내 안은 어딘가 준비가 덜 된 느낌이었다.
욕심과 빈틈이 맞은편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오늘 많이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위로도 이제는 잘 안다. 고개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자꾸만 휑했다.
하고 싶은 마음에 비해, 지금의 나는 얇은 종이 한 장처럼 느껴졌다.


나는 컵을 살짝 돌려가며 테이블에 맺힌 물자국을 옮겼다.
그 동그란 자국이 마치 오늘 내가 움직이는 속도를 정하는 듯했다.
물자국이 금방 마르면 하루가 바쁜 것 같고, 오래 남아 있으면 느린 하루 같다.
나는 느린 쪽을 택했다.


창문을 손바닥만큼만 열었다. 바람이 아주 조금 들어올 정도만.
대단한 변화는 아니고, 그저 작은 틈 하나.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필요한 건 멋진 문장보다 “여기에 그냥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조용히 붙잡아두는 것.
그래서 스스로에게 조그만 규칙을 만들었다.


한 단락이면 충분하자고. 꼭 특별한 주제를 잡지 않아도, 방금 내 눈에 들어온 것부터 써보기로 했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 식으면서 진해진 커피, 창틀 위의 먼지, 그리고 허공을 맴돌다가 끝내 내려앉지 않았던 생각 하나.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공허함은 때로는 욕심이 남긴 그림자 같다.
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으면 허전한 마음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빈 느낌만으로도 나름 괜찮은 신호가 아닌가 싶다.


아직 오지 않은 문장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물론 준비되지 않은 내 모습이 왠지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
준비가 덜 된 걸 스스로 인식하는 것, 그게 사실은 진짜 준비의 첫걸음일 테니까.


오늘은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많은 문장을 쓰지 않아도, 그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낸 나를 기록하는 것.
“좋은 컨디션이 돌아온 날, 나는 자리를 지켰다.” 그 한 문장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하다.


내일은 여기에 한 문장만 더 얹으면 된다. 그렇게 문장이 쌓이고, 어느새 글이 된다.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바람이 종이 위를 스쳐갔다.
허공을 떠돌던 생각이 아주 천천히 이 자리에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박한 결론 하나가 책상 위에 조용히 남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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