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절 사용법: 천천히, 정확하게

단편

by 박동욱

지독한 여름이 지나갔다. 창문을 여니 바람이 얇아졌다. 땀이 먼저 말하지 않고, 마음이 먼저 말을 건다. “이제 괜찮다.” 가을이 들어오면 나는 늘 센치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계절의 우울은 나를 가라앉히지 않는다. 마치 나에게 꼭 맞는 사이즈의 코트처럼, 조용히 어깨를 덮고 체온을 맞춘다. 그래서일까. 조금 우울해도 괜찮고, 조금 울컥해도 안전하다. 그 감정의 온도가, 가을과 잘 어울린다.


길을 나서면 그림자가 길어진다. 낮은 햇살이 사람들의 뺨을 사선으로 스친다. 노란 전광판도, 오래된 간판도, 오후 다섯 시의 빛을 입으면 다정해 보인다. 나는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낸다. 셔터음이 한 번, 마음이 한 번 따라 내려앉는다. 여름 내내 달아오른 생각들이, 차분한 포커스를 찾는다. 사진은 늘 내가 먼저 멈춰줘야 찍힌다. 멈추는 연습을 하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횡단보도 앞에 떨어진 은행잎, 종이컵 뚜껑에 맺힌 얇은 물기, 가게 문턱에 걸터앉은 고양이의 느린 하품. 예전 같으면 스쳐 지나갔을 풍경들이다. 가을은 속도를 줄여주는 계절이다. 줄어든 속도만큼, 마음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평범해서 좋다”는 말이 진짜 문장으로 느껴진다.


나는 요즘, 사진 한 장마다 짧은 글을 붙여보는 상상을 한다. ‘오늘의 온도 18도, 마음의 온도 21도.’ ‘바람은 동쪽에서, 생각은 안쪽에서.’ 대단한 이야기를 쓰려는 게 아니다. 그날의 공기와 내가 지나간 자리만 남겨두려 한다. 사진이 장면을 잡아주면, 글은 그 장면의 숨소리를 적어준다. 둘이 나란히 있으면, 오래 지나도 금방 돌아갈 수 있다.


가을은 내게 작은 용기를 준다. 이 계절엔 괜찮아 보인다. 조금 느려도, 조금 덜 웃어도, 더 묵직한 말을 꺼내도. 누군가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늘어난다. “그냥 그런 날”이라는 말이 허락이 된다. 그래서 행복하다. 행복은 종종 떠들썩하게 오지 않는다. 내 책상에 조용히 앉아, 따뜻한 머그컵처럼 손에 쥐어진다.


욕심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를 들자 마음이 앞선다. 오늘은 좋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글을 써서, 오랜만에 마음에 딱 맞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 욕심이 지나치면 손이 다시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나와 작은 약속을 한다. “한 장만. 한 문단만.” 욕심을 접는 게 아니라, 욕심을 ‘들어올 수 있게’ 자리 깔아주는 일. 이상하게도, 그 약속을 지키면 한 장이 두 장이 되고, 한 문단이 다음 문장을 부른다.


가을은 실패에 관대하다. 흔들린 사진도, 삐뚤어진 문장도 이 계절에선 덜 미워 보인다. 노을이 퍼져버린 하늘처럼, 정확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그 느슨함이 나를 살린다. 완벽을 포기했더니, 오히려 마음이 또렷해진다. 나는 노출을 조금 낮추고, 숨을 길게 내쉰다.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손으로 셔터를 누른다. 그 한 번의 ‘딸칵’이 오늘을 저장한다.


걷다 보면, 가을은 사람의 얼굴을 닮는다. 누군가는 이별 중이고, 누군가는 시작 중이다. 같은 바람을 맞아도 표정은 제각각이다.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찍지 않는다. 대신 마음속에 저장한다. 타인의 계절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가을의 예의는 아마도, 각자의 속도를 인정하는 일일 테다. 내 속도도, 네 속도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카메라 메모리엔 몇 장 되지 않는 사진이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은 꽉 찼다. 오늘의 장면을 내가 직접 붙잡았다는 감각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을 늘려준다. 내일의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며, 오늘의 공기를 다시 마실 것이다. 그러다 한두 줄의 문장을 덧붙이겠지. 그렇게 하루가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여 계절이 된다.


창문을 조금 더 연다. 바람이 커튼을 천천히 밀어낸다. 커피는 미지근하고, 방 안의 그림자는 길다. 나는 셔터를 내려놓고 펜을 든다. 사진이 멈춘 장면이라면, 글은 그 장면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을 불러낸다. 나는 나직하게 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드디어 나의 계절을 만났다.” 이 문장을 적는 순간, 설렘이 자리 잡는다. 설렘은 소란이 아니라, 조용한 확신의 다른 이름이다.


오늘의 목록을 짧게 남긴다. 첫째, 바람이 달라졌다. 둘째, 걷는 속도가 천천히 맞춰졌다. 셋째,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늘었다. 이 세 가지면 충분하다. 대단한 성취가 아니어도, 나는 오늘을 잘 통과했다. 다가오는 겨울을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계절은 늘 자기 일을 한다. 나는 그저 내 계절을 제대로 살면 된다.


밤이 깊다. 카메라는 가방으로 돌아가고, 노트엔 몇 줄의 문장이 남았다. 허공에 머물던 생각들이 바닥을 찾은 것 같다. 나는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른다. 내일의 태양은 오늘보다 조금 낮게 떠오를 것이다. 그 아래에서 또 한 장, 한 문단을 더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가을이 와서 다행이다. 이 조용한 다행이, 오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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