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진심이었으면 됐어
그 사람에게 나는,
시간을 때우기 좋은 사람.
심심할 때 불러내기 쉬운 사람.
가끔 지갑으로 쓰기에도 부담 없는,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다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늘 멀고,
목소리는 형식적이었고,
대화 속 나는 늘 주변부에만 머물렀다.
그런데도…
그렇게라도 내 이름을 불러주면,
나는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정이 아닌 습관이었을지 몰라도,
그녀에게 나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지만,
내게 그녀는 “없으면 숨이 막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쓰임새가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나만이라도 진심이면, 사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껴안고,
나는 점점 진짜 호구가 되어갔다.
누가 봐도 답 없는 사랑,
끝을 알고도 달리는 러브레터.
모두가 말렸다.
그만하라고, 한심하다고.
그래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녀와의 연결고리,
비록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놓는 순간, 진짜 끝일까 봐 무서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의 끝은 언제나 비극일 거란 걸.
하지만 나는…
그 비극 안에서도 한 페이지쯤은 내 사랑으로 채웠다고 믿고 싶었다.
그게 착각이든 자기 위안이든,
나는 그렇게 사랑을 완성해 버린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끝나버린 사랑 앞에서
가장 공허한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 빈 가슴을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문득문득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