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로드 <2> 부산대역 앞, 주례여고 앞 골목 등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by 신동욱

"학교 앞에서 박찬욱 감독님 만났어요!" 언젠가 친하던 후배 한 명이 이렇게 말하며 호들갑이었다. 나는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을 때까지 후배가 보여주는 핸드폰을 보고 또 보았다. 정말 '깐느 박'이었다. 후배는 박찬욱 감독이 일행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어주셨을뿐만 아니라, 당시 개봉을 앞두고 있던 영화 <아가씨>(박찬욱, 2016) 이야기까지 잠깐 나눠주셨다고 했다. 그날은 <올드보이>(박찬욱, 2003)가 한국영화에 남긴 성취를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올드 데이즈>(한선희, 2016) 촬영을 위해 박찬욱 감독이 직접 영화 촬영지를 다시 찾은 날이었다. 우연히도 후배들은 영화학도에게는 존재 자체로 동기부여라 할 만한 영화감독을 만나 <올드 데이즈> 영화에까지 출연할 수 있었다.

오대수가 걸어 내려갔던 계단(왼쪽)과 한 방 맞고 뻗어 누웠던 온천천 친수공간

후배들이 감독님을 만난 곳은 부산대역 3번 출구 앞이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곳은 오대수(최민식)가 상상 훈련이 실전에 쓸모가 있는지를 확인했던 곳이다. 왕복 2차선 도로를 씩씩하게 건너온 오대수는 곧장 계단을 타고 온천천으로 내려가 소위 '양아치 무리'와 맞섰다. 함부로 담배를 빼앗아 폈다가 한 방 세게 맞기도 하고, 'X빵새'라고 TV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던 욕도 먹었다. 그래도 오대수는 이 싸움에서 이겼고, 그 자신감으로 아직까지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전설의 '복도 롱테이크 결투'에 임했다. 그러니 수많은 <올드보이> 촬영지들을 두고 박찬욱 감독이 굳이 왜 부산대역 3번 출구 앞을 찾아왔느냐 싶을 수 있지만, 이곳은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한 방 맞은 오대수가 대자로 뻗었던 자리에 선다. 오대수인 척 한 번 누워볼까도 잠깐 망설였지만 내게 그럴 용기는 없다.


영화가 개봉한 지 20년이 지나 이곳은 그때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당시엔 촬영장에 몰린 인파가 워낙 많아 촬영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한재덕 PD가 현장을 통제하며 '극대노했다'고 하고, 박찬욱 감독도 이곳에서의 촬영이 <올드보이> 전체 중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학가는 예전같지 않다. 상권이 몰락하여 건물 곳곳에 임대가 붙었다. 오대수의 후경에 걸려 있던 가게들부터 당장 일 년이 멀다 하고 간판을 바꿔 달다가, 지금은 오니기리와 이규동이 들어서 영업 중이다. 계단도 무장애 데크길로 교체됐고 온천천 담벼락에 있던 그래피티도 지워졌다. 영화 촬영 당시 현장에 놀러 온 강혜정, 윤진서 두 배우에게 줄 책 선물을 위해 박찬욱 감독이 들렀던 40년 전통 청암서점도 2025년 10월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 그 자리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가 들어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애써 부산대역을 찾아오더라도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렵다.


오대수와 미도가 만났던 일식집 '올드보이 스시'가 있던 곳(왼쪽)과 촬영 당시 만덕동신타운이었던 베스티움 에스포레

다른 <올드보이> 촬영지들도 마찬가지이다. 미도(강혜정)와 오대수가 처음 만난 스시집은 금정구 온천동에 있는 일식집 고젠이었다. 오대수가 "살아있는 게 먹고 싶다"라며 산낙지를 뜯어먹고는 기절했던, <올드보이> 팬이라면 성지순례 방문지 1순위로 꼽힐 만한 곳이다.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가게는 간판까지 '올드보이 스시'로 바꿔 달고 영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2014년 결국 폐업했다.


미도가 살던 아파트는 북구 만덕동신타운이었다. 오대수가 그 집에서부터 이우진(유지태)을 본격적으로 추적했었고, 그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벌을 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공간이다. 하지만 재건축 대상지에 포함되어 모두 철거되었다. 이곳 주민들의 재산권을 생각한다면야 그깟 영화 촬영지가 다 뭐냐 할 일이지만, 한국영화 팬인 내 입장에서는 영화 속 장면을 깡그리 뭉개버리고 말끔하게 올라가버린 신축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할 때가 많다.


한국영화 촬영지 답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내 머릿속에는 아주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는 상상이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진지하게 사업을 구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올드보이 스시'가 있던 건물 임대 현수막을 보며 든 생각이 하나 있다. 내가 저기를 임대해서 '올드보이 스시'를 다시 살려내면 어떨까. '미도 스시 오마카세'랑 '오대수 산낙지회' 메뉴를 개발해서 말이다. <올드보이> 영화 팬들과 박찬욱 감독을 모두 이곳으로 모시고 다 같이 산낙지회를 뜯어 먹는 모습을 그려본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미도의 집도 마찬가지이다. 박찬욱 감독은 초기작이라 할 만한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에 만든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공동주택을 촬영지로 자주 활용해왔다. 그 바람에 영화가 개봉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나 촬영지를 답사하는 내 입장에서는 느닷없이 신축 아파트 임장을 다니는 기분이 들지만, 언젠가 한국영화 속 세트를 모두 복원하여 한 곳에 모은 테마파크를 개장하겠다는 오기마저 생길 때가 있다. 적어도 영화 속 집들을 그대로 재현한 이른바 '시네필 전용 체험형 숙박시설'까지는 시도해보고 싶다.


만약 정말 구상을 실현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복원하고 싶은 한국영화 속 집은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이 살던 펜트하우스이다.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64층 펜트하우스에 수로가 흐르고, 자동으로 열고 닫히는 옷장과 거실 한복판에 무심하게 놓인 샤워 부스를 완벽히 복원할 수만 있다면. 나처럼 영화를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직접 살아보고 싶은 시네필들에게 색다른 체험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음 날 나는 모처럼 부산에 모인 '살인의보이'* 형님들과 함께 주례여자고등학교 앞 골목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도 물론 부산에서 초중고 대학교를 모두 나왔지만, 부산에 있는 학교들은 왜 죄다 산만디**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른바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2005) 마지막 장면을 주례여고 앞 골목에서 촬영했다. 복수극 대서사에 마침표를 찍은 곳이다. 영화에서와 달리 부산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지만, 주례여고는 눈이 온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고지대에 있는 것 같다. 마을버스라도 놓치는 날이면 주례여고 학생들 통학 난이도가 여간 높지 않겠다.


서부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주례여고 앞 골목 경치


뜻밖에 골목을 특정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벽화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골목 왼쪽에 분명 돌로 쌓아 올린 축대가 있는데, 아무리 살펴도 이게 보이지 않았다. 후배 작업을 도와주겠다며 형님들이 차에서 내려 흩어지고는 주례여고 근처 골목 이곳저곳을 살폈고, 벽화 때문에 우리가 축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봇대 위치와 집 모양을 여러 번 비교해보고 나서야 우리는 금자씨(이영애)가 두부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었던 골목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학청할머니경로당에서부터 주례여고 방향으로 뻗은 길이 약 200m 남짓해보이는 골목. 벽화를 그리거나 공원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요소를 미리 제거하거나 줄이는 일명 셉테드(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CPTED) 사업은 2005년부터 우리나라 지자체에 확산했다. 주례여고 앞 골목 벽화도 취지는 물론 셉테드 사업 일환이었을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 엔딩 장면 촬영지


아쉬운 건 벽화 그 자체보다는 내용이다. 영화 촬영지들을 답사하다 보면, 나는 우리나라 지자체 행정이 조금만 더 디테일을 살려나갔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다. 주례여고 앞 골목에서도 그랬다. 벽화에는 영화 촬영지인 골목 서사가 반영되지 않았다. 내가 담당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벽화 어디에다 얼굴 모양으로 찌그러진 두부 케이크 하나를 무심히 그려 넣고, 그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2005'라고 써넣었을 것 같다. 아니면 영화 속 명대사 ‘너나 잘하세요’ 만이라도 무심히 써놓았으면 어땠을까. 등하굣길 주례여고 학생들이 교훈처럼 읊고 다녔을텐데. 지자체가 오래된 마을 역사 발굴에 세비를 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벽화 하나를 그려도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반영하려는 세심한 노력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자체 행정만큼이나 무심했다. <친절한 금자씨> 촬영지 갈 생각이었으면 땡땡이 원피스를 입기는 남 보기에 흉하더라도, 두부 한 모는 샀을 걸 그랬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오대수처럼 갇히는 상상을 해 본다. 아내와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기는 할 것이지만, 오대수만큼 억울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제니(권예영)보다 금자씨를, 이우진보다 오대수를 좀 더 가깝게 느끼는 나 같은 분들에게 복수 3부작 촬영지 답사가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시작이기를 바란다.




✦ 부산대역 3번 출구

- 주소: 부산 금정구 장전온천천로 48

- 주차: 부산대역 남측 또는 북측 공영주차장

- 주차비: 시간당 1800원, 일일 최대 8000원

- 소요시간: 30분 내외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20년 지나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 교통 & 접근성 ★★★★★ 지하철 역 바로 옆, 주차장도 가깝다

- 풍경 & 자연 ★★★ 온천천은 부산의 한강

- 난이도 ☆ 쌩쌩 달리는 자전거는 조심

- 감성 & 사색 ★★★☆ 이야기하며 산책하기에 좋은 장소



✦ 주례여고 앞 골목

- 주소: 부산 부산진구 진사로 50번길(개금동)

- 주차: 주택가 임시 주차 가능

- 대중교통: 부산 지하철 2호선 냉정역에서 마을버스 5번 또는 5-2번

- 소요시간: 20분 내외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등하교 시간만 빼면 감상에 잠기기 좋은 분위기

- 교통 & 접근성 ★ 높고 또 높다

- 풍경 & 자연 ★★☆ 서부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

- 난이도 ★★☆ 주택가이므로 큰소리 대화는 자제

- 감성 & 사색 ★★★☆ 자신을 돌아보고 싶다면 두부에 초 하나 꽂아 가기를



* '살인의보이' 모임에 대해서는 제주편 '입안이 그냥 호강허난 제주 맛집 <2>'에 자세히 써두었다.

** 산만디는 산꼭대기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이지수 'Cries And Whispers' (영화 <올드보이> OST)

- 배재혁 'The Old Boy'(영화 <올드보이> OST)

- 심보라미 'Farewell, My Lovely'(영화 <올드보이> OST)

- 심현정 'The Last Waltz'(영화 <올드보이> OST)

- 조영욱 '친절한 금자씨'(영화 <친절한 금자씨> OST)

- 조영욱 '기도하는 금자'(영화 <친절한 금자씨> OST)

- 조영욱 '슬픈 인연'(영화 <친절한 금자씨> OST)

- 조영욱 '구슬 이야기'(영화 <친절한 금자씨> OST)


*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 페터 회「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마음산책, 2005)

- 츠지야 가론, 미네키시 노부아키 「올드보이 1~8」(아선미디어, 2003)

- 이청준 「벌레 이야기」(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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