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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령고

12. 4부 사자의 울음(2)

구령고(龜苓膏)


“냄새는 때때로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색의 언어이며, 시간의 기억이다.”

이세는 우드랜즈역에서 MRT를 탔다. 북남(NS)라인을 타고 도비곳(Dhoby Ghaut)역에서 동북(NE)라인으로 갈아탄 후 두 정거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차이나타운역.

해가 땅거미로 내려앉은 저녁 7시.


골목마다 중국풍 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그는 단숨에 달려갔다.

그가 찾는 것은 단 하나.
구령고.

500년을 산 거북과 깊은 산중에 있는 복령을 1년간 달여 만든다는, 전설의 검은 향고.

“거북 냄새… 복령 냄새…”
이세는 집중하여 코끝을 밤의 공기에 맡겼다.

스치는 냄새의 조각들이 도시의 레이어처럼 겹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는 다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편 골목을 지나 중국음식점,
야채 가게, 자전거포, 과자 가게를 지나니 마침내 ‘쿵워통’이라는 한약재 상점이 나타낫고,

그는 그 앞에 멈춰섰다.

붉은 바탕, 금색 한자로 쓰인 간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닫았네. 나가.”
카운터 뒤의 중국인 노인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세는 숨을 골랐다.
“이 냄새… 당신 가게에서 나는 이 향을 찾고 있어요.”

노인의 눈이 번뜩였다.
“뭐? 향?”

“구령고 향고 말입니다.”
이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노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이들이 이 향을 원했지.

목에 뱀 문양이 새겨진 자들… 하지만 그들은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어.”

“관문이요?”

노인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오직 예언된 자만이 통과 할 수 있지.”

노인은 그를 가게 깊숙한 곳, 숨겨진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황실의 규방처럼 빛과 향기로 가득한 방이었다.

방의 중심에는 수십 개의 긴 관이 배치되어 있었고, 관의 끝엔 작은 램프들이 달려 있었다.
관문은 단순하지 않았다.

“이곳은 ‘빛의 방’이다. 향은 색을 입고 태어나지. 램프에서 빛이 비치면 향기가 나.
그러나 곧 향은 사라지고, 빛만이 남게되니 기억해! 네가 맡은 그 향기의 색깔을.”

왕쉬의 음성은 무거운 의식처럼 울렸다.


조향의 콘셉트는 ‘하늘’이었다.

‘프러시안 블루’가 깜빡이면 베티버,
‘오렌지 빛’은 베르가못,
‘바이올렛’은 아이리스루츠,
‘브라운’은 머스크…

이세는 한순간의 빛과 향을 머릿속에 기억하며
색깔별로 유리병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향을 섞기 시작했다.


기초제(Base)로는 머스크, 샌들우드, 베티버.
조화제(Blender)로 라벤다, 시클라멘.
변조제(Modifier)로 미묘하게 페퍼민트를 더한다.

그는 조향사이자 화가이며 작곡가였다.
향이라는 파장을 조율하는 무대 위의 지휘자와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마지막 방울이 병 안으로 떨어졌다.

램프가 꺼지고, 빛이 사라졌다.


이세는 향이 담간 병을 왕쉬에게 내밀었고 향을 맡자,

순간 방 안에 시트러스 프레쉬 향과 함께 영롱한 빛이 퍼졌다.

탑 노트엔 오렌지, 피치, 바질, 레몬.
미들 노트는 자스민과 장미, 시클라멘.
베이스는 베티버, 패츌리, 머스크, 샌들우드.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마지막 한 조각은
어머니의 냄새였다.
가을 소풍날, 하늘을 바라보며 잠들었던 그 향기.

왕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래… 너였구나. 내가 평생 기다리던 향기천사.”


왕쉬는 가슴에 품고 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진한 갈색의 구령고 향고가 있었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이것을 맡기만 해도, 무덤 속의 죽은 자가 눈을 뜬다는 전설이 있지.”

그리고 그는 곁의 진열장에서 조심스럽게 또 하나의 병을 꺼냈다.
은빛 각인, 뚜껑엔 용무늬.
각시향이라 불리는 전설의 향이 담긴 주석 병이었다.

“십주기 취굴주의 신목에서 채취한 반혼수라 불리는 이 향은,

향 하나로 영혼을 되돌린다고 하지.
내가 죽기 전 이 향을 전할 사람을 기다려왔지.
이세, 이제 네게 맡긴다.”


향은 기억이고,
기억은 영혼이며,
영혼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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