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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 후각으로 떠나는 여행

2.  Episode 제주.  얼음꽃

에피소드 제주 얼음 꽃     

 “오랫동안 향을 찾아다녔다. 물명(物名)이나 지역에 따라 향기는 추억이 되어 나의 코끝에 머문다.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이 머무는 도시, 그곳에는 언제나 깊은 그리움과 사랑이 묻어 있다. 그리고 삶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임을 향기는 소리가 되어 내 귓가에 속삭인다.”     



 

2월의 제주는 쌀쌀한 해풍 탓인지 완전히 겨울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고 있다. 공항에서 서귀포로 가는 길은 눈이 쌓여 길이 험하다. 1100m 도로는 눈이 많이 쌓여 언제 개통이 될지 모르기에 우회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과, 생각지도 않은 많은 문제들이 항상 우리 곁에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또 한 번 느끼게 한다. 삶은 참으로 녹녹하지 않은 것이다.     


오후의 햇살이 내 눈을 따갑게 하는 것은 햇빛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멀리 보이는 바다와 어촌 마을의 풍광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드럽게 들리는 파도소리와 바람의 냄새가 나의 기억을 깨운다. 아직 유채꽃의 냄새는 맡을 수 없지만 비릿한 물 냄새는 실컷 맡는다. 

차를 멈추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바닷가 곳곳을 배회하던 하오의 시간, 갑자기 내 코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어촌마을의 길을 걷다 보니 걸음걸음마다 다른 냄새가 스쳐간다. 

바닷가의 해초, 길가의 나무, 오래된 집과 가게, 리어카에 놓인 오징어, 골목의 생선 비린내, 된장찌개, 나는 배도 채우기 전에 그 모든 냄새에 익숙한 세상을 돌아다니는 다소 독특한 경험을 하였다.      

     



서귀포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있다. 운이 좋았던지 예약에 문제가 있어 내가 머무는 숙소의 발코니는 바다와 인접해 있는 곳으로 변경되었다. 아직도 계속해서 눈이 내린다. 

그날 밤 비릿한 물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냄새는 아무런 미동 없는 의식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향기는 빛이 되고 소리가 되어 나를 일으키며, 새벽의 여명이 가시지 않은 지난 기억의 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얼음 꽃! 그 향은 서서히 나의 기억의 공간을 메워간다. 약간은 쓰고 비릿하며, 아침이슬을 머금은 순수하고 투명한 이끼 냄새가 감도는 그 향은 잘 정돈되지는 않았으나 행복한 미소가 배어있는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오래전 초 봄의 어느 날, 나는 한라산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 서귀포에서 1100m 도로를 따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넓은 초원과 용암의 잔재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별천지로 데려간다. 

같은 내 나라지만 이곳은 언제나 낯선 이국땅이다. 산 중턱쯤일까? 일기가 심상치 않았다. 금방 안개가 끼고 습한 물기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질 않았다. 

차를 잠시 세우고 밖으로 나와 보니 평소에 보지 못한 나무 사이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아직도 겨울의 끝자락이라 나무에는 잎과 꽃이 없다. 금방이라도 세찬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이 먹구름을 몰고 와 세찬 비를 뿌린다. 나는 차에 올라 1100m 고지로 향했다. 

 어느새 비는 멈추었고,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탓에 차 유리 안쪽에 하얀 서리가 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야릇한 냄새, 그것은 물 냄새도 아니고 안개 냄새도 아니었다. 한라산의 흙과 나무의 냄새일까? 아니면 무슨 냄새란 말인가?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길가에 줄줄이 서있는 나무의 가지마다 맑고 투명한 얼음 꽃이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그 얼음 꽃과 향기는 지금껏 내가 보고 맡았던 어떤 꽃과 향기보다 아름답고 깨끗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향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순간에 핀 얼음 꽃이 잠시 나뭇가지에 머문 뒤 잔상과 잔향만을 남기고 홀연히 천상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평생에 한 번 보고 맡기도 어려운 얼음 꽃을 또 만나고자 한 나의 여정은 욕심일까? 눈이 그치길 기다려도 계속해서 내린다. 


다행스럽게도 이튿날 하오에 눈이 멈췄다. 전화를 하니 오늘도 1100m 도로를 갈 수 없단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하나? 눈으로 인해 목표와 목적을 잃은 나는 방황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차가 마시고 싶다. 

서귀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남 제주에 있는 녹차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봄에 왔으면 좋으련만 겨울이라 차밭은 아직 제 색을 내지 못하고 있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고 차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 차 종합전시관에서의 녹차 한 잔과 아이스크림이든 녹차 롤 케이크로 시린 마음을 대신해 본다. 천혜의 자연과 사람의 정성이 담긴 이곳은 관광지에서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이 문화적으로 발전되어 가면서 후각은 퇴보되어 갔다고 했다. 우리는 후각이 뛰어난 사람을 개에 가깝다는 식으로 말한다. 아마도 오감 중에 가장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후각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얼마나 이 후각에 의해 부드러움과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가는 잘 알지 못한다. 말할 것도 없이 후각은 냄새를 대상으로 한 감각이며, 감성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어서 지식의 세계와는 또 다른 범주인 예술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차를 입으로 마시지 않고, 코로 마시는 것도 좋을 법하다. 

 나는 코끝에 찻잔을 대고 천천히 차의 향기를 마시기로 한다.     


이제 떠나는 날이다. 관광 안내소에서 적어준 곳으로 전화를 하니 오늘은 1100m 도로로 갈 수 있다고 한다.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숙소를 떠나 차에 오른다. 내 마음은 벌써 한라산으로 향하고 있다. 

가는 길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다. 산 중턱에 이르니 나무들은 눈에 쌓여 아름다운 눈꽃을 피어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얼음 꽃을 만날 수는 없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온 산을 비추고 있다. 도저히 비는 올 것 같지 않다. 그러다 내 코는 킁킁되기 시작한다. 물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한 곳에 멈춘다. 눈꽃이 녹아 똑똑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향기를 내고 있는 눈 숲 속의 나무였다. 바람이 멈춘 그곳, 그 나무의 틈에서 떨어지는 눈물의 순간을 보았다. 비록 얼음 꽃의 향기는 아니었지만 눈꽃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의 향기를 맡게 된 것이다.      


우리는 냄새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그것들은 감각적 기억만으로 경험할 뿐이다. 어떤 향기를 맡았을 때 어떠한 단어에 앞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냄새와 함께 연상되었던 현상의 기

억뿐이다. 


 얼음 꽃, 다시는 맡을 수 없을지라도 또한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난 그 향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눈꽃의 눈물 또한 사랑할 것이다. 순간의 아름다움이 영원히 내게 기억될 때에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니까.


사진 : 송인갑/송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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