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Episode Tasmania -후 온 파인
“어떤 식물의 향은 멀리서 맡을 수 있고, 또 어떤 식물의 향은 가까이 다가가도 향이 나지 않는다. 멀리서도 향을 맡을 수 있는 것은 그 향이 꽃이나 잎에 있기 때문이요. 가까이에서도 맡을 수 없는 것은 그 향이 줄기나 뿌리에 있기 때문이다.”
테오프라스토스(Teophrastos, 고대 그리스의 식물학자)
사람을 처음 만날 때나 새로운 곳에서 갖는 느낌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마련이다. 그래서 첫 느낌은 모든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할 때에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의 추억이 생각날 때 우리는 사진을 보거나, 비디오에 담아둔 영상을 보기도 한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무게에 눌려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맡은 냄새로 인해 잊고 있었던 고향을 기억해 내기도 하고, 이국의 풍경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소녀가 생각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식되어 버린 후각의 경험이 작용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알 파치노가 나오는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에서 시각 장애인이 되어버린 그가 함께 탱고를 추던 여인의 향기를 맡고는 그녀가 쓰고 있는 비누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어떤 계기로 인해 잠재되어 있든 후각을 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후각은 타고나지만, 그 능력은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1만 년의 태고의 고독이 숨 쉬는 호주의 태즈매니아(Tasmania)섬,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멜버른으로 가야 한다.
멜버른에서 비행기를 타고 항구도시인 호바트에 도착한 것은 2월의 끝자락에 놓인 늦은 오후였다. 우리나라와 반대편에 있는 이곳은 아열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한 여름이었다.
호바트의 첫 느낌은 아스팔트를 따갑게 내려 쪼는 햇빛의 내음이 바닷가의 바람과 함께 무수한 은구슬처럼 우리 곁을 스치고 가는 그런 곳이었다, 태고의 맑음이 있고, 깊은 우주의 신비가 있는 자연의 땅이었다.
호바트 항구에 저녁이 왔다. 태양이 서서히 기울며 바다에 투영되고 있다. 길게 뻗은 석양의 잔상이 호바트의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낯선 이방인에게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황홀한 광경이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이 다가온다. 하늘은 너무나 맑아 내가 투영되어 버린다. 별빛이 유성처럼 내게 쏟아져 피할 곳을 찾지만 더 이상 숨을 곳도 없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어떤 소리도 지금은 정지되어 버린 듯하다. 그 정적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서움은 편안함과 평온을 가져다준다. 그냥 이렇게 있고 싶다. 태고의 정적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며 시간을 거슬러 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적막감 속에 잠이 든다. 내 영혼에 속삭이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내일 떠나야 할 후온 빌을 그리면서 말이다.
호바트에 아침이 왔다. 창문을 통해 집들 너머로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큰 산이 눈에 들어온다. 빛나는 태양은 교회의 종탑을 여인의 품처럼 감싸 안고 있었으며, 골목의 깊숙한 곳과 도로 앞 음식점에서 묻어 나오는 냄새는 골목골목으로 휘젓고 돌아다녔다.
맑고 푸른 바다 위에는 요트가 떠다니고 멀리 수평선에는 온갖 배들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유희 속에 피어난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뽐내며, 레스토랑의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는 중년 신사의 모습과 탁자 위에 놓인 커피 잔이 독특한 공간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잠시 뒤, 떠나간 이가 남긴 커피 향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신문과 대조를 이루며 이방인의 가슴에 묘한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인생의 진리라고 하였다. 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온 것은 그 아름다움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다. 1년에 1cm씩 자라며 천년 이상을 산다는 후온 파인의 아름다운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다.
우리는 후온 소나무의 태고의 순간을 찾으러 후온 빌로 향한다.
호바트 시내의 거리에 늘어 선, 19세기 사암으로 지은 오래된 창고 건물들을 지나 자동차로 20 여분 정도 달리면 바람과 빛에 어우러진 마운트 웰링턴(Mount Wellington)의 대자연이 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은 태즈매니아의 바다와 육지의 순수한 자연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좀 더 남동쪽으로 가면 서늘한 콜스 베이의 와인농장들을 만날 수 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자연에서 자라고 만들어진 원시를 이곳에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후온 밸리(Huon Valley)는 호바트 남쪽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동편에는 운하의 해안선과 길게 뻗은 초록빛 언덕, 그리고 브루니(Bruny) 섬의 하얀 모래밭이 해안에 펼쳐진다. 이 언덕과 마을은 농부와 목공예가, 과수원지기, 벌목꾼, 어부들의 다양한 삶이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호바트에서 후온으로 향하는 여정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마도 타루나(Taroona)의 외곽을 따라 펼쳐진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콜스 베이를 지나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가면 사과와 후온 파인의 태고가 있는 후온 빌과 리치몬드(Richmond)를 만나게 될 것이다.
후온 빌(Huon ville)로 가는 길은 자전거 하이킹을 하거나 근거리 드라이버를 즐길 수 있는 지루하지 않은 도로로 이어진다. 그 길은 평탄한 길과 다소 꼬불거리는 길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현실이 아니라 게임 속의 도로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길가에는 나무가 많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전신주나 장식물들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무인판매대에서 사과 한 봉지를 샀다. 맛이 아주 뛰어나다. 한국 사과만큼은 새콤한 맛이 덜하지만 달고, 향이 풍성하게 느껴진다. 근처에 있는 전시장을 가보니 온통 나무로 만든 공예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주로 유칼립투스 나무와 후온 소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무절제한 벌목으로 인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자연이 우리 곁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그동안 여기에서도 있었나 보다.
차창을 열어 놓은 채 달리기 시작한 지 두어 시간 길은 똑 같이 이어지고, 그 주변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열린 창문과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냄새가 매 순간마다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칼립투스, 포도와 사과, 햇빛에 부딪쳐 부서지는 자두의 향기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내게 와 닿는다.
후온 빌에 도착했다. 고요한 후온 강둑에 자리 잡은 후온 빌은 언덕을 뒤덮은 과일의 화려한 빛깔에 감싸여 있다.
세계 자연유산인 후온 빌 정상은 태즈매니아 남부 탐험이 시작되는 곳이다. 후온 계곡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태즈매니아 사과의 절반가량이 된다고 하니, 그래서 곳곳에 사과 판매대가 있고 마을 곳곳에 사과의 모형과 사과 모양의 장식품을 팔고 있나 보다. 매년 3월이 되면 ‘후온 맛보기 행사(Taste of the Huon)' 열리며, 이때 수십 가지가 넘는 다양한 품종의 과실을 맛볼 수 있어 이곳은 과일 천국이 된다고 한다.
그때를 떠올리며 아마도 후온의 과일 향기가 행사장과 온 마을을 뒤덮을 것 같은 상상을 해본다.
그곳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우리의 목적지인 태즈매니아가 자랑하는 웅장한 남부 삼림이 등장한다. 후온 강이 계곡을 따라 깊은 원시의 삼림 사이로 흐르고 있다. 큰 강줄기를 따라가면 숲 사이로 작은 물줄기를 만날 수 있으며, 강물에 투영된 숲의 색을 본다. 짙은 초록과 무채색의 빛이 하늘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 작은 강줄기에 보이는 것은 핏빛의 물이 아닌가? 놀라 뒷걸음을 치니, 강물이 붉은 것은 강바닥에 자라는 ‘단추 풀’ 때문이란다. 한갓 풀이 붉게 만든 것을 왜 이렇게 놀랐는지, 때때로 우리의 고정관념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픽톤(Picton)과 후온(Huon) 강이 만나는 지점 위로 공중에 높이 매달아 놓은 ‘타훈 삼림 에어워크(Tahune Forest Air Walk)’를 따라 태고의 숲을 경험한다. 공중에서 보는 숲은 넓고 웅장했다. 에어워크에서 아열대의 원시를 보던 관광객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말하고 있다. 공중 다리는 그 편리함에 비해 자연을 훼손시킨다는 생각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후온 계곡을 따라가다 만나는 후온 소나무 숲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비록 더디게 자라나지만 그만큼 큰 가치를 지닌다. 숲의 공기를 장악해버린 향기는, 온 숲을 하나의 무리로 모여 떠도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바람이 멈추어선 곳으로 퍼져나갔다.
후온 파인 숲은 언제나 감미로운 향기를 지니고 있다. 촉촉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은 송진과 나무를 서로 비비게 하며 그곳의 향기를 바람에 실어 남극의 빙하로 날려 보낸다. 하오에 살포시 내리는 비는 솔잎을 적시며, 고사리과 식물과 야생화들이 이 소나무 숲 곳곳의 빈 땅에서 자라게 한다.
골짜기에는 강줄기가, 산 중턱에는 유칼립투스와 태고의 향기가 나는 아열대 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후온 파인은 송진의 향기와 함께 바람이 머문 곳에 거대한 향기의 숲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크고 푸른빛을 내뿜는 후온 파인과 마주한다. 너무나 큰 키에 질려, 순간 모자를 깊게 누르며 살며시 고개를 들어 냄새를 들이켜 본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나무에 길게 늘어선 잎에서 쏟아지는 초록이 빗물과 어우러져 짙은 푸름의 물이 되어 모자 위로 굴러 떨어진다.
비가 멈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부신 태양의 입김이 하늘을 가린 나무 사이로 스며온다. 아주 긴 길을 지나 만나게 된 후온 파인,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이 지내온 시간의 흐름을 내게 보여준다. 태고의 원시로부터 이어온 후온 파인은 영원함을 전해주지만, 나는 오히려 순간을 만난다.
아열대의 뜨거운 빛이 대지를 향해 불어오자 후온 파인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쏟아낸다. 눈물은 향기가 되어 숲 속에 숨어 있는 모든 냄새를 가두어 진한 원시의 냄새를 퍼뜨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내게 자신이 지켜온 아주 긴 외로움과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후온 파인의 진정한 눈물은 죽기 전 단 한번 흘린다고 하였는데, 왜 그 눈물을 내게 보였을까?
후온 소나무 숲에 어둠이 내린다. 어둠은 점차 숲 전체를 빨아들여 석양 너머로 사라지고, 송진과 나무와 풀들은 잠이 들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질 않는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나 보다. 우리는 후온 파인의 영원한 향기를 가슴속에 묻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사진 : 송인갑/송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