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일컬어,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 내렸다기로, '두류산(頭流山)'이라 하고, 남해 바다에 이르기 전에 잠시 멈추었다고 하여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기 전에 명산을 찾아 기도를 올렸는데,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 (燒紙)가 오르지 않았다고 하여 '불복산(不伏山)'이라 불리며 ,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사는 산이란 뜻으로 '지리산(智異山)'이라 이름 지어진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 오래전 여름 나는 그곳에 갔다.
7월의 끝은 찌는 듯한 더위와 까만 태양이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나의 살갗 역시 허물을 벗으며, 7월에 그곳에 다녀왔다는 흔적을 아직도 남기고 있다. 나는 그곳에 왜 이끌리듯 갔을까? 그곳에 이르며, 아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최한기 선생과의 150년 전쯤의 약속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그야말로 갑자기 들었다.
신라 시대,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 성모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해서 명명되었다는 노고단(老姑壇). 다큐멘터리 촬영진과 함께 그곳으로 가기 위한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맑았던 날씨가 산 중턱에 다다르자 운해(雲海)가 몰려와 끈적거리는 물 냄새를 코끝에 흩뿌리며 지나갔다. 일기가 좋지 않으려는 것일까? 산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507미터의 노고단 정상에 가까이 다가서자, 거짓말같이 구름이 없어지고 정상이 반갑게 맞는다. 정상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생태계 보전을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다만 그 아래에 인위적인 작은 단을 만들어 서운함을 달래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통제를 풀고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은 사전예약을 하면 들어가 볼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굳게 잠겨있던 철문을 열고 한 걸음을 내디디니 숨이 턱 막혀온다. 30만 평의 초원에 노란 원추리 꽃과 보랏빛의 비비추 그리고 색색의 이름 모를 야생화가 캔버스에 그린 그림 같다. 단 한 번도 옷깃을 열지 않은 그 비경에 그저 숨이 막힐 뿐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부족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눈부신 빛과 어우러진 운해는 내 코끝을 감싸 오는 향기와 함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실감 나게 해 준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처녀지의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숨이 막혀오는 감동을 느끼며 아이처럼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뛰어놀다'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다시 알게 된 듯했다.
뽀얀 운해는 손에 잡힐 듯, 구름이 되어 산을 감싸 안고 서서히 집어삼켰다 그러나 내게 정작 중요했던 것은, 지리산의 빼어난 풍광도, 노고단 정상의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움도 아니었다. 내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인생에 향기를 불어넣어준 계기가 된 그것은 바로 정상의 바위틈에 있는 작은 땅이었다.
푸른 이끼와 보라색의 이름 모를 야생화가 새치름하게 피어 있는 그 작은 땅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도 촉촉이 젖은 모습으로 수줍은 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마음이 뭉클해졌던 것일까 나는 시간의 흐름 따위는 잊어버린 채, 싸한 물 냄새가 가득한 작은 땅에서 지난 시간을 쫓고 있었다.
향기가 있는 땅·····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은 땅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땅을 내 마음대로 '소지(小地)'라고 부르기로 했다. 소지는 나를 우리 향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했고, 나를 거듭나게 하는 의미를 던져 주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향기 속에서 보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냄새의 감각 속에서 보냈다. 때로는 베네치아의 물과 유리 속에 있었고, 파리의 향수 회사에 드나들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베르사유에 있는 향수 학교에서 장 파투의 조향사인 쟝 케를레오를 만났을 때이다. 흰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센 머리카락, 가녀린 손과 맑은 영혼이 담긴 눈을 가졌다.
“진정한 조향사가 되기 위해서는 30년 이상 향과 함께 살아야 한다”
는 말을 남겼던 그는 자신의 삶이 바로 하나의 예술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 케를레오의 향은 그의 영혼이 담겨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었던 것이다.
향수는 서양에서 연금술사에 의해 알코올이 발명된 이래, 서양 사람들의 특유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인위적으로 향을 추출하고 또 그것들을 합쳐 만든 사치품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향수는 대량으로 생산되고 이를 널리 이용함으로써 더 이상 귀한 사치품이 아니게 되었다.
'눈이 한 예술이 미술이고, 귀가 한 예술이 음악이라면 코가 한 예술은 향수이다.'라는 말만으로도, 이제 향수는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며, 그 기능이나 향으로만 논하지 않는다. 향이라는 독특한 이미지와 특유한 문화의 산물로서 그 가치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향수는 어떠한 것일까. 1872년 국내에 처음 알코올로 만들어진 향수가 들어온 이래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 질과 다양한 모양의 각종 향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에 대한 소비량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만 소비만 있을 뿐이다. 즉 문화는 없는 현실이라는 말이다. 분명 우리에게도 향의 역사와 문화는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을 거치며 잊히고, 사라졌을 뿐이다. 향수는 사치와 쾌락의 상품으로, 예술이 아닌 사치품으로만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양의 향의 역사 또한 서양 못지않음을 알게 된다. 물론 향수 제조 기술 그 자체로서는 동·서양 사이의 문화적 차이와 산업적 이유로 아직도 많이 뒤떨어져 있지만, 향으로만 판단한다면 오히려 체계적이며, 다양한 원료와 기술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향 문화는 정신과 마음을 중시하였기로, 자연 그대로의 향을 즐겼으며 , 사람과 향이 어우러지는 것을 원하였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인 향과 현대적인 향수 산업을 공존시켜갔다. 향사를 정리하고 향 제조 방법을 전수시켰으며, 또한 서양의 향수를 받아들여 그들 특유의 상인 정신으로 향료 회사와 향수 회사, 그리고 향을 담아낼 수 있는 각종의 용기 제작과 다양한 디자인 산업까지 국가와 기업, 학교가 하나가 되어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한 예로, 그들은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철저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아직도 동양의 향수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 시장의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유명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는 프랑스 현지에 BPI(Beaute Prestige Int'1)사를 1990년 설립하였다.
이브 생 로랑 향수의 부사장인 샹탈 루스(Chantal-Roos)를 영입하고, 이세이 미야케와 장 폴 고띠에 브랜드를 도입하여 1992년 5월 이세이 미야케의 첫 향수 '로디 세이' (L'eau d'issey)를 발매하게 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일본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 시장은 오직 프랑스제와 그 브랜드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어 낸다. 그들은 단순히 향을 만들고, 그것을 담아낼 용기를 만드는 기술자가 아니며, 오랜 경험과 영감이 있어야 하기에 예술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오피움, 이터니티, XS 등 수많은 향수 용기를 디자인한 피에르 프랑수와 디낭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향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의 요소가 필요로 한다고 했다.
"향(The Essence), 디자인, 용기, 론칭에 관련된 사람 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투자가 하나의 공간에서 모아져야 한다. "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맡은 냄새를 기억할 수 있는 후각 기억 장치(Olfactory Memory)를 뇌 속에 지니고 있다. 다만 후천적으로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전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으나, 자신에게 맞는 향수를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리산에 다녀오고 꼭 일주일 후에 큰비가 내렸다. 당분간 지리산에 가도 원추리 , 비비추, 술패랭이꽃 등 아름답고 향기로운 초원의 야생화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작은 땅에 피어있는 이끼와 이름 모를 꽃은 그대로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언젠가 노고단의 초원은 다시 생기를 찾을 것이며, 꽃이 만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향기가 한반도를 감싸 안을 때쯤이면 우리도 우리의 아름다운 향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