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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 후각으로 떠나는 여행

8. 450년을 이어온 사랑

8. 450년을 이어온 사랑    


작은 땅의 그윽한 향기가 아무런 미동 없는 의식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향기는 빛이 되고 소리가 되어 나를 일으키며, 새벽의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로 나를 내몬다. 

스쳐가는 잿빛 냄새는 묻혀 있던 아픈 기억의 문 밖으로 나를 데려간다.


푸른빛이 감도는 어둠의 한쪽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예사롭지 않다. 

상투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들고 있는 주머니 속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향은 서서히 어둠의 공간을 메워가고 있다. 약간은 쓰고 비릿하며, 아침 이슬을 머금은 이끼 냄새가 감도는 그 향은, 잘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슬픔이 배어있는 듯한 느낌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빛이 향이 되어 소리로 내게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향일세,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지만, 먼 훗날 많은 이들이 이 향을 맡으며 나를 기억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일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은 언제나 우릴 늙어가게 만들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기 쉽다네. 하지만, 그렇지 않네. 사실은 잃어버린 그 무엇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때가 왔음을 말하는 것일세. 그것은 한 여인에게 바치는 나의 사랑이네."


소리는 향이 되고 다시 빛으로 변하여 사라져 버렸다. 어둠이 걷히고, 차창 밖에 아침의 빛이 쏟아져 내린다. 꿈이었나, 생생히 기억되는 모든 것을 떠올리며 내 몸은 경북 안동으로 향하고 있다.  

   



450년 전 묻혔던 한 할머니의 시신이 미라로 발견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안동 그곳으로 가는 길은 폭우가 쏟아진 후라 도로는 찢긴 상처를 드러내어 놓으며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겨우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안동시 정산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 식당 앞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하였다. 어쩌면 그가 무덤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유일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5척 단구의 깡마른 체격을 가진 그의 팔자걸음을 보고, 한눈에 양반의 후예임을 알 수 있었다.


이도행 할아버지, 그는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 이광의 18대 손이며, 미라의 주인공인 일성 문 씨는 그의 16대 조모이기도 하다. 또 다른 동행인은 발굴 당시 참여하였던 안동대 조규복 학예 연구사였다. 

무덤으로 가는 길은 택지 개발 중이어서 곳곳이 파헤쳐져 있었고, 비가 온 뒤여서 차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산 중턱에 차를 세워 놓고 한참 걸어 올라가 겨우 무덤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다녀간 후여서, 무덤은 휑하니 파헤쳐져 물만 잔뜩 괴어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왜 지금 와서 그 일을 알고자 하느냐?" 하며 

매스컴에 지친 지난 시간에 대해 관하여 푸념을 한 뒤, 그 얘기를 풀어놓았다.


이광의 손자며느리 '일성 문 씨'의 부군은 전의감(典醫監)이었으며, 그녀의 시아버지도 전의감이었다고 했다. 2대에 걸친 전의감, 그것은 내게 큰 의문을 던져 주었다.

조선시대 때는 궁중의 내의원에 향장이-지금의 조향사에 가깝다- 4명, 상의원에 2명, 도합 6명이 있었다고 문헌에 전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향은 한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나의 의문은 조 연구사의 발굴 당시 상황 설명을 들으면서 더욱더 커져갔다.


관의 뚜껑을 열었을 때, 여느 무덤과 달리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할머니의 모습은 중년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옷이 200벌이나 나왔다. 그 향이 허리춤에 있는 향주머니에서 나는 것 같아 열어보니 까맣게 된 나팔꽃 모양의 열매가 100여 개 들어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이 열매가 무엇이기에 450년 동안이나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을까? 

자연의 열매, 아니면 전의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나는 당장 그 열매를 보지 않고는 궁금증을 풀 수 없어,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안동대 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열매를 담았던 향주머니뿐, 열매는 볼 수 없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복주머니 모양인 향낭은 색이 누렇게 변해버렸고, 450년 전의 향기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특유의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평범한 것이었다. 

열매는 성분 분석을 의뢰하였다며 보여줄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향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조차 꺼려하였다. 왜냐하면, 전의감의 부인이기에 집안에 있었던 단순한 한약재이거나 개인 장식품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미라가 된 원인이 석관이나 향낭 때문이라는 언론의 섣부른 결론에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열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없었기에 쉬쉬하는지도 몰랐다.




답답했다. 어찌 사학자나 고고학자가 향을 알 수 있겠는가? 사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향 열매일 것이다. 우리의 향사와 중국, 일본 등의 향사를 살펴보면, 식물과 한약재를 모르고는 향을 만들 수 없었던 명백한 사실이 있지 않은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집트의 향고는 전문가들에 의해 정확히 밝혀진 것에 비해, 아직도 우리는 권위주의와 배타주의 때문에 향의 역사가 잘못되고, 다시 기억의 저쪽으로 사라지 게 하고 있지 않는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조명은 인류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을 터인데‥‥‥ 

아무튼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모습에서 현실의 슬픔을 느꼈는지, 몇 마디 말을 남기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나중에 몇 개의 열매라도 구해 드릴게요. 하지만 그 결과를 공개하지는 마세요."


안동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그 향기를 뇌에서 끄집어내어 본다.


 “젊은이, 왜 16대 조부께서는 조모님의 무덤을 꼭꼭 봉하여 생전의 모습을 간직하셨을까? 그리고 45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어 놓게 하셨을 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요."


이도행 할아버지의 16대 조부께서는 부인을 진실로 사랑하셨는데, 그 부인이 어느 날 깊은 병을 앓아 중년의 나이에 숨을 거두셨을 것이다. 조부께서는 그 사랑하는 부인을 생전의 모습대로 아름답게 꾸미고, 전의감인 자신의 비법으로 무덤을 만들어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열매를 넣은 주머니를 허리춤에 채웠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자손들에게, 언제인가 파헤쳐질 무덤의 향기를 통하여 두 분의 사랑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두 분의 사랑은 접어 둔 채, 드러나 보이는 영생과 비법에만 관심만을 가졌기에 나를 이곳에 불렀는지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1,0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고대 도시 국가의 수도 테베 지금은 룩소르라 불리는 이곳은 나일강을 끼고 고대 문명이 발생하였으며, 향의 역사가 시작 곳이기도 하다. 룩소르의 서쪽 사막 계곡에 아크로폴리스(왕가의 무덤)라 불리던 곳이 있다.


1922년 영국의 이집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에 의해, 이집트 제18대 파라오, 바로 투탕카멘(Tutankamen)의 능묘가 이곳에서 원형 그대로 발굴되었다. 

백합유를 이용한 사그디, 쿠아무이, 몰약과 카네라와 벤 오일을 원료로 한 베토피움, 헤나의 꽃향유를 이용한 시푸리늄을 섞어 향고를 만들어 담은 아름다운 아라바스터항아리가 이 능묘에서 발견된 것이다.

3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 발견된 향고는 끈적끈적한 물질로서, 손에 묻히면 체온으로 약간 녹는다고 전해지며, 향기가 남아 있는데, 느끼한 냄새가 마타리과 식물의 냄새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그것은 감송향의 영향 때문일 런지도 모른다.


오늘날까지 보존하게 된 것은, 강한 방부성을 가진 유향이나 보류 성이 높은 방향성 수지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무덤에서 신체의 여러 부분을 향기롭게 하고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향은 다각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영생과 부활의 뜻을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근래에 유럽의 유명 향수회사에서는 동양의 향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몇몇 회사에서는 실론티나 중국의 향들을 사용하여 독특한 향수를 만들어 발매했는데, 꽤 인기를 끌고 있다.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 것을 찾아 우리의 향기를 만들면 어떨까?

또한 작은 땅의 향기가 450년을 이어온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일시적인 감정이 아닌 영원한 사랑으로 이어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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