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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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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05. 2016

퇴사 일기 10. 후배의 송별회

후배님 대단해

나와 함께 퇴사를 준비하던 후배의 송별회가 열렸다. 회사 앞의 고깃집에서 열린 송별회는 평소의 회식과 다를 것 없었지만, '퇴사 송별회'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높은 참여율을 이끌어냈다. 아마 그 후배가 회사 생활을 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송별회에 묻어서 공식적으로 퇴사를 이야기하려 했다. 내가 주인공이 된 송별회를 별도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포커스가 집중되는 것이 싫기도 했고, 그냥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평소에 술을 하지 않던 그 후배는 특별한 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주를 조금씩 마셨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그를 보며 매우 의아해하면서도, 이내 연거푸 건배를 외쳐댔다.

송별회라고 해서 딱히 분위기가 어두웠던 것은 아니다. 포커스가 그 후배에게만 집중되는 것도 아니었고 퇴사 관련 이야기가 꼭 메인 테마가 된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에 그 후배에게 한마디 시키기 전까진 여느 회식과 똑같았다.

회사 회식의 끝은 누구 한 명 일어나 몇 마디 한 후에 '위하여'를 외치며 마무리되는 게 일반적이다. 일어난 사람은 대부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부서원들 앞에 서서 평소보다는 좀 더 크고 높은 톤의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연차가 짧을수록 그 이야기의 길이가 짧고, 연차가 길수록 그 이야기의 길이가 길다. 연차가 높은 사람이 회식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하는 건 타의가 아닌 자의의 경우도 많고, 그 시간은 학창 시절의 교장선생님 훈시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날은 역시 주인공인 후배가 일어나 한마디 하게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후배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고, 감정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살짝 보였다. 왠지 준비한 듯한 멘트들이 나열되었으며,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은 적절한 길이로 말을 마쳤다.

그 후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한마디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별도의 송별회를 갖지 않으려는 생각도 있었고, 실제로 회식자리에서 내 이야기도 많이 거론되었기에 내 차례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일어서서 할 말을 한 마디씩 떠올려봤다. 그런데 일어서서 이야기하게 되면 그 후배와 달리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후배처럼 적절한 길이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기보단, 질질 끌며 이야기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못 감춘 채, '울지 마! 울지 마!'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듣자마자 눈물을 막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한번 들고나니 어떤 이야기를 할지 구상은 안 하고 눈물 참는 연습만 미리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차라리 나한테 아무 말도 안 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간단히 인사를 마친 후배가 참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다음 주자는 내가 아닌 나의 선배들이었다. 한 여선배는 후배와 나의 퇴사를 함께 거론했고, '처음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다.', '회사 나가서도 잘들 할 것이다.'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까지 거론해줌으로써 나의 퇴사는 완전히 공식화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 선배는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린 이 친구들이 참 대단한 것 같다.'라는 말을 하며 덕담을 이어줬다. 

그 남자 선배는 단 한 번도 진지한 어투로 나와 대화를 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늘 장난과 농담으로 서로를 대했으며, 괜히 한대씩 툭툭 치고 지나가는, 남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러던 사람이 그날만큼은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대화를 나눴다. 이미 슬하에 아들이 둘이나 있는 그 선배는, 퇴사 결정에 대해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라 못 박고 부러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한숨 섞인 표정은 처음 보았으며, 그런 그에게 '아직 늦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같이 한숨을 쉬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1살 차이일 뿐이었지만, 이미 그의 어깨엔 많은 짐이, 발목엔 많은 족쇄들이 채워져 있었다.

이후, 퇴사 예정 후배의 동기가 일어나 한마디 하게 되었다. 동기의 퇴사를 바라보는 마음을 이야기했는데, 내용이 조금은 씁쓸했다. '본인은 자신이 없어 이 회사의 끈을 놓지 못하고 다니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야 나갈 사람이니 별 신경 안 썼지만, 인력 관리 입장에 있는 간부들로서는 곱게 넘길 수 없는 멘트가 아니었나 싶다. 앞으로 간부들이 그 후배를 색안경 끼고 볼까 걱정됐다. 

생각보다 길었던 그 후배의 말이 끝나고, 한편에선 나에게 말을 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러나 책임 한 명이 '쟤는 아직 확정된 거 아니다. 아직 관문이 좀 남았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커피 타임'을 가지며 퇴사 가능성을 처음으로 말했던 책임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질질 짤 수도 있는 시간이 내게 오지 않아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나도 퇴사할 건데...?'라는 생각이 했다. 그 책임의 표정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넌 퇴사 못한다.'라고 내게 말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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