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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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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06. 2016

퇴사 일기 11. 쭈꾸미 석식

상사와의 데이트

나의 퇴사가 서서히 기정 사실화될 시점, '후배의 송별회'에서 나에게 퇴사 인사의 기회를 앗아간 한 책임이 일과 후 나에게 카톡을 보낸 적이 있다.


"어디니?"

"기숙사입니다."

"머하노?"

"방금 전에 빨래 좀 돌렸습니다."(사실 난 빨래를 돌리지 않았고, 혹여 불러낼까 봐 안 나갈 이유라고 만든 게 겨우 빨래다.)

"ㅋㅋ... 맥주 한잔할래? 벌써 기숙사라... 귀찮나? 낼 저녁 한 끼 하자..."(감사하게도 바로 다음날 약속으로 바꿔주셨다.)


그 책임은 고과 면담 때 '퇴사 가능성'의 뜻을 전했던 사람으로, 가장 오랫동안 나의 퇴사 의지를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가 '퇴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나의 말을 들은 지 한 달 반쯤이 지났을 시점에, 내가 아닌 다른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기정 사실화된 나의 퇴사 소식을 접했고, 그날 저녁 나에게 카톡을 보낸 것이다.


퇴사 만류를 위한 만남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불편한 자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와는 많은 대화를 했던 사이라서 만남 자체가 그리 불편하거나 꺼려지지는 않았다.


다음날 오후 6시쯤 되자 '나가자'는 메신저가 왔다. 우리는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은 어색해질 수도 있는 자리가 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꺼낸 대화 주제는 '펌'이었다. 항상 이발소식 커트를 고수하던 그가 펌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때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그 당시 관심사'를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내 나름의 회사 생활 방법이었다. 회식자리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으쌰 으쌰 하는 스타일이 못 되기 때문에 난 사람들과 1대 1로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친해져놔야 했고, 친해지는 최고의 방법은 상대방의 관심사를 캐치해 대화의 주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에겐 결혼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주식을 하는 사람에겐 특정 종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갔고, 내가 더 많이 아는 분야라면 열변을 토하며 말하고, 내가 조금 더 모르는 분야라면 상대방에게 질문을 해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나의 대화 방식은 책임과 함께 식당에 가는 길까지 아무런 어색함이 없게끔 해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회사 앞의 식당을 갔을 테지만, 그날만큼은 30~40분쯤 가야만 하는 곳까지 갔다. 그 지역에서 쭈꾸미로 굉장히 유명한 식당이었고, 이전에도 그 책임이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식당이었다. 최대한 회사 사람들을 안 마주칠 수 있는 곳으로 날 이끈 건지 아니면 정말 좋아하는 식당이어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맛있는 쭈꾸미를 먹을 수 있다면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식사를 시작하고 회사의 이모저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누가 어디로 간다더라.', '그 사람은 원래 어느 부서에 있던 사람이다.' 등등, 회사 내의 다른 사람 혹은 사건,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나의 퇴사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이야기를 안 꺼내시는 건지, 혹은 못 꺼내시는 건지. 내가 먼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날의 석식은 나의 퇴사 이야기로 마무리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얼마 전에 새로 넘어온 애들... 공정(엔지니어) 쪽으로 끌어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약간 우회적으로 말을 꺼냈다. 나와 후배 1명이 동시에 퇴사를 하게 되면 인력이 부족하니, 새로운 부서원들을 우리가 빠진 자리에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도의 질문이었다. 즉, 일단 난 퇴사하는 건 확정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엔 공정 쪽에 사람이 많아."


당시 부서엔 타 부서에서 전배 온 사람이 많아서 인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적응 기간이 필요한 인력이 많았다. 사람이 아예 없는 상황은 아니니 인력을 더 끌어오기는 좀 그렇다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그 답변은 나의 퇴사를 염두에 두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퇴사란 단어는 밥 먹는 내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쭈꾸미가 좀 맵네.'라는 게 우리 대화의 유일한 결론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근처의 커피숍을 찾았다. 술 안 먹는 날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차를 탄 지 한 5분 만에 한 커피숍을 찾았다. 호수 앞에 위치한 그 커피숍은, 국도변의 불륜 커플들이 자주 드나들 것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난 미숫가루 한 잔을 시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요즘 커피숍 같지 않게 주문한 커피를 직접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 둘러보니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불륜 커플들이 있나 한번 둘러봤지만 그런 사람들 또한 보이지 않았다. 


주문한 음료들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여전히 우리 대화의 주제는 '퇴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책임과 단 둘이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데?'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나에겐 가깝고 편한 분이었다. 단지, '메인이벤트'가 계속 뒤로 밀린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1시간 정도 대화를 했을까. 갑자기 눈을 반쯤 감고 약간 먼 산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어... 그... 너 그거는 그렇게 하기로 한 거야? 퇴사?"


역시나 그에겐 꺼내기 힘든 단어였는지, '어... 그...'라는 버퍼링을 앞에 내세운 채로 '퇴사' 이야기를 꺼냈다.


"아, 네. 퇴사하려고요."

"언제?"

"3월 15일 자로 하려고요."


그 어느 때보다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내가 상사에게 이렇게 빠르고 간결하게 대답할 날이 오다니. 일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 이후 책임이 하는 모든 말엔 한숨이 약간씩 섞여있는 듯했다. 한창 발에 땀나듯 뛰어다니며 일해야 할 연차의 부서원들이 빠지는 것이니, 관리하는 입장으로선 한숨이 안 섞일 수가 없었다.


"아... 부서의 든든한 허리가 빠져나가는구나..."


든든한 허리? 내가 그런 존재였던가? 처음 알았다. 난 부서 내에서의 나의 입지를 허리로 비유할 때, 요추 5번이 빠지고 척추 측만증 걸린 신검 4급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의 말은 퇴사를 만류하기 위해 최대한 나를 치켜세워줬던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일부러 치켜세워주는 그가 갑자기 고맙게 느껴졌다. 나를 한 번이라도 더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던 것이다. 꼭 사람이 필요해서란 느낌보단, 내 인생을 걱정해주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좋은 상사가 아닌, 좋은 동네 형이 생긴 기분이었다. 마지막까지 누구 하나 잡아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그랬다면 아마 가슴 한편에 서운함과 비참함을 갖고 스스로를 '누구 한 명 잡아주지 않는 병신'으로 여기며 아무런 자신감 없이 회사를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나를 기숙사 앞에 내려주는 순간에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을 건넸다. 알았다는 대답을 하며,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나 퇴사 여부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원래 굉장히 갈팡질팡하는 성격이었는데, 그 당시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날의 '쭈꾸미 석식'은 이런저런 고민 없이 그저 감사한 마음이 충만했던 시간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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