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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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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07. 2016

퇴사 일기 12. 2차 관문

진짜 퇴사 면담

바쁜 회의 일정때문에 나와의 면담 일정을 미루자고 했던 그룹장이 어느날 나에게 메신저를 보내왔다.


"내자리로 와라."


부서 내의 부장과 면담을 할 때보다 훨씬 긴장이 됐다. 당당하게 내 발로 회사 나가는 건데 긴장할 이유가 뭐였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는 내가 회사생활하면서 처음으로 겪은 부서장이었기 때문이다. 날 부서로 데리고 온 사람도 그였고, 회식자리에서 처음으로 술을 따라준 사람도 그였다. 퇴사 당시엔 우리 조직보다 한 단계 더 큰 그룹의 장이었지만, 2년이 넘는 시간을 매일 보던 사람이라 유독 마음가짐이 달랐던 것이다.


그룹장의 자리로 가서 그와 독대를 했다. 별도의 밀실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둥 뒤에 놓인 원형 테이블과 의자들은 나름의 밀실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음소거 수준으로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거나, 누가 지금 옆을 지나가는지 등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어 그래. 무슨 할 얘기가 있어?"

"아...네 다름이 아니고요. **이랑 같은 이유인데요. 퇴사를 하려고 합니다."


나의 첫 멘트는 부서 내 부장에게 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던 것 같다. 부탁할 일이 있을 때면 습관적으로 본론 앞에 붙이던 '다름이 아니고요'라는 말이 기계적으로 튀어나왔고, '저만 퇴사하는 거 아니니 뭐라 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을 숨긴 듯한 '**이랑 같은 이유인데요.'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왜 퇴사를 하려고 하느냐는 물음에도 부서장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말했다. '누나, 매형이랑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라는 거짓말.


그룹장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워낙에 본인의 기분을 잘 표출하지 않는 편이었다. 업무가 잘 진행이 안될 때에도 부하에게 쌍시옷 섞인 욕을 하며 나무라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부드러우면서 조금은 차가운듯한 말투로 업무를 지시하던 편이었다. 무엇보다 남달랐던 건, 업무 지시를 함에 있어 타당한 이유나 근거가 늘 있었다는 것이었다. 회사에는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많다. 타당한 근거가 없어도 '뭐라도 해봐'라는 식의 업무 지시를 내리는 게 그런 경우들인데, 적어도 그룹장은 늘 근거를 들어서 업무를 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내가 책임질게'라는 마인드 또한 탑재하여 부하에게 기댈 자리를 만들어주던 사람이었다.


이런 그룹장의 성향상, 무조건적으로 나에게 '나가지 말아라'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이유를 들어보고 그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 같았다. 그런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꼭 퇴사하는 거 말고, 다른 길은 생각 안 해봤어?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해본다거나..."

"아...제가 뭐 부서 옮겨달라고 때 쓸려고 퇴사한다고 하는 게 아니어서요. 다른 부서에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초반의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진듯 당당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그룹장은 바로 알았다고 답했다. 늘 이유와 근거를 갖고 일을 했던 그룹장은, 나의 퇴사 이야기에도 그 룰을 똑같이 적용하는듯했다. 내게 이유가 있으니 더 이상 잡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2차 관문은 생각보다 쉽게 끝이 났다. '그룹장이 너 못 나가게 할 거다.'라고 했던 책임의 말은 도대체 무슨 근거가 있었던 건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퇴사 절차는 한 단계씩 진행되고 있었다.


그룹장과의 짧은 면담이 끝나고 다음날이 되었을 때, 갑자기 그룹장이 다시 나를 불렀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2차 관문'이 재시작되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고 그룹장에게 갔다. 그가 나에게 한 말은,


"다른 사업부로 한 명 보내야 하는 상황이 왔는데, 네가 좀 가보는 건 어때? 물론 도의적으로 이건 아니다 싶을 수도 있지만, 다른 부서에서 우리 쪽으로 사람 보낼 때 군대 갈 예정인 애들 보내고 그랬거든. 그래서 우리가 인력이 부족한 것도 있고... 그리고 다른 데 가서 회사 생활을 조금 이어가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말이야."


부서장이 내게 했던 제안과 같았다. 내가 부서장에게 실망을 느꼈던 바로 그 제안이었는데, 그룹장이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룹장에겐 실망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도의적인 부분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모습, 인력이 부족한 현실을 부서장보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준 점, 그리고  정말 내게 어렵게 부탁하는 것 같은 느낌의 어조 등, 여러가지가 내 마음을 조금은 움직이게 했고 미안하게도 만들었다. 게다가 환경을 바꿔 한번 더 회사생활을 이어가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듣게 되니 그 자리에서 바로 아니라고 대답을 못하게 되었다.


"하루만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퇴사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어떻게 최대한 완곡하게 퇴사의 뜻을 다시 한번 전달할까가 고민이었다. 그룹장이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음날, 그룹장에게 다시 찾아간 나는 변함없는 퇴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는


"그래도 그룹장님께서 저한테 부탁하신 건데...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 어떤 의도도 섞이지 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멘트였다. 그러자 그룹장은


"아니다. 어차피 네 인생인데 뭐. 괜찮아."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이 덜어졌는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면담이었다. 이후의 어떤 면담에서도 그런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지시를 내리던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가장 합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던 상사로부터 부탁을 받게 되니 마음이 묘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묘한 건 묘한 거고, 나가는 건 나가는 거다. 그렇게 난 2차 관문을 클리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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