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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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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05. 2016

퇴사 일기 9. 1차 관문

칼자루는 나에게

비공식적으로 나의 퇴사 소문이 퍼져가면서, 공식적으로도 절차를 밟아야 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2월 초쯤.

옆자리를 쓰던 퇴사 예정 후배는 나보다 조금 더 일찍 회사를 안 나오기 위해 미리 절차를 밟고 있었다. 남은 연차를 이용하여 2월 말경부터 출근을 안 할 예정이었고, 나는 그와 반대로 2월까지는 모두 출근한 후 3월부터 연차를 소진할 계획이었다. 후배는 임용 고시 준비를 위해 하루라도 공부에 매진할 날들을 빨리 맞이해야 했고, 별 계획이 없던 나는 조금 더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3월부터 쉴 예정이었다.

퇴사 예정 후배는 나보다 한 템포씩 빠르게 퇴사 절차를 밟으면서 많은 것을 알려줬다. 누구부터 접촉을 해야 하는지, 면담은 몇 번 하는지, 결재는 누구누구한테 받아야 하는지, 퇴직금 정산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등, 아무리 회사 선배라도 가르쳐주지 못할 정보들을 알려줬다. '퇴사 선배'다웠다.

면담은 적어도 4번은 해야 했다. 1차 부서장, 2차 부서장, 팀 내 ER(Employee Relations:내부 소통 담당), 인사과 등, 이렇게 4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고, 면담과 결재는 별도로 진행하는 프로세스여서 총 7~8번은 움직여야 하는,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과정이 퇴사 앞에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절차가 복잡한 이유는 한 번이라도 생각을 더 하게끔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혼 숙려 제도와 유사하다고 할까.

첫 번째 면담은 1차 부서장인 부서 내의 부장과의 면담이었다. 공식적으로 일정을 잡은 것은 아니고 메신저로 접촉한 후 당일 오후 5시가 됐을 무렵 빈 회의실에서 면담을 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아 다른 게 아니고요. **와 같은 이유인데요, 퇴사를 하려고요."

부장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힘들다.', '부서를 옮겨달라.'등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격투 게임으로 비유하면 가벼운 공격을 차례로 받은 것이 아닌, 시작부터 10단 콤보 공격을 모조리 받은 사람의 표정? 그리고 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퇴사 예정 후배가 면담하고 간 지 며칠 안됐을 때였기 때문이다. 사원, 선임(대리) 급에서 한 번에 2명이나 빠져나간다고 하니, 관리자로선 안 놀라는 게 이상한 거다.

"갑자기 뭐 때문에 그러냐?"
"아... 누나와 매형이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걸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저 대답에서 진실은 '누나와 매형이 미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고, 거짓은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였다. 나와 면담을 하는 간부들에게는 설득조차 못하게 하려고 사업하러 간다는 핑계를 애초에 만들어뒀다. 다른 때 같으면 쭈뼛대며 할 말 잘 못 했을 자리이지만, 내가 요청한 퇴사 면담이기에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 왠지 내가 '갑'이 된 느낌이었다. '어떻게 나오나 보자.'라는 심리도 섞여 있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기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여유를 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편안한 상관과의 면담이 언제 또 내 인생에 찾아올지.

"아하... 회사 나가야 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안 나가고, 한창 일해야 될 사원, 대리급에서 자꾸 나간다니까..."


'회사를 나가야 될 나이 많은 사람들이란 '부장', 당신 부류를 지칭하는지?' 이런 미소 섞인 궁금증을 갖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는 집에 손님이 올 예정이라며 퇴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리를 파하며,


"나중에 다시 한번 얘기하자."


라고 했다. 내 의사는 분명하게 전달했다. 회사 내에서 칼자루가 나에게 있다는 게 엄청 신기한 경험이었다.

설 연휴가 끝나고 난 다시 부장과 면담을 하려 했으나 기회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간부들은 늘 회의에 치이는 일상을 살았기에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게 그 주의 금요일 저녁까지 추가 면담의 시간을 갖지 못했고, 주말의 휴무를 맞이해 난 서울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뒹굴대던 토요일 오전, 휴대폰으로 부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떤 목적의 전화인지는 바로 짐작이 갔다. 그런데 조금 예상 못한 내용을 듣게 됐다.

"아... 이번에 다른 부서로 사람을 1명 넘겨줘야 되는데, 네가 좀 가면 안 되겠니? 퇴사로 2명 빠지고, 다른 부서로 1명 보내기까지 하면 한 번에 3명이 빠지는 거니까... 인력 손실이 너무 커서... 근무 안 나올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래. 내가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다른 부서로 1명을 또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 만약 퇴사하려는 나를 다른 부서로 보내면 우리 부서의 손실은 2명이 되기에 한꺼번에 3명이 빠지는 상황은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나가려고 마음먹은 내가 다른 부서로 간다는 건, '일단 내 밑에서 나가는 건 막는다.'라는 취지로 밖에 안 보였다. 퇴사자가 많으면 부서장으로서 인력 관리를 잘했다는 이야기는 못 듣기 때문이다. 그럼 만약에 내가 다른 부서로 옮긴 후 퇴사를 한다면? 옮겨 간 부서의 부서장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퇴사를 확고히 마음먹은 내겐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언제 사원들 근무를 그렇게 걱정했다고?'라는 생각을 하며, 단호히 말했다.

"어차피 저는 나갈 사람인데, 다른 부서로 옮긴 후에 퇴사한다는 건 그 부서에 피해를 주는 일 같아서...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부장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말했다. '근무 걱정', '인력 과다 유출' 등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럼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편법을 써보려 하는 모습에 당당히 맞서다니, 이번 전화 면담에선 칼자루를 넘어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얹어 놓은 기분이었다. 

그 후에 긴 이야기는 없었다. 메신저였는지, 직접 가서 이야기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부장에게 퇴사의 뜻을 다시 한번 확고히 전달한 후 다음 관문을 찾아가기 위해 일정을 잡았다. 다음 관문은, 직급은 '부장'으로 우리 부서장과 같지만, 그보다 한 단계 위 조직의 장인 '그룹장'이었다. 입사 초기에 날 부서로 이끌고 온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난 그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그룹장님, 안녕하세요. 면담 요청드립니다."
"지금은 회의가 있으니, 이따가 오후에 얘기하자."
"네 알겠습니다."

2차 관문은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진짜 퇴사 여부는 그룹장 면담에서 결판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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