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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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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19. 2016

퇴사 일기 18. 동기들과의 만남

남는 건 동기뿐이다.

'남는 건 동기뿐이다.'라는 말을 연수 시절에 많이 들었었다. 그땐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리고 나의 의문이 정당한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동기들과의 관계는 이미 소원하다면 소원했다. 정말 친한 동기 몇몇을 빼곤 결혼식 때 잠깐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팀원이 총 23명이었는데, 서로의 얼굴을 조사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걸 보면, 팀원 모두 조사에는 서로 부르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조부모상 때 동기들을 따로 부르진 않았었고. 여하튼 우리는 조사보단 경사에서만 만나는, '남는 건 동기뿐이다.'라는 속담과도 같은 말과는 괴리가 있는 그런 모임이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동기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내가 회사를 떠나면서 한 번쯤은 꼭 얼굴을 봐야 할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단체 메일에 '여러분 제가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나 다음 주 중으로 다들 보고 싶은데, 아래 표에 되는 요일을 체크해 주세요.'라고 써서 보내기엔 조금 민망했다. 어떻게 동기들을 모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한 동기 형으로부터 온 메일이 있었다. 본인의 결혼 소식을 알리며 모임을 한번 갖자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잘 됐다 싶었다. 이 모임에 나가 인사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여느 회식과 다를 것 없이 만남은 고깃집에서 이뤄졌다. 내가 갔을 땐 이미 2명 정도가 먼저 와 있던 상태였다. 자리를 앉자마자 역시나 나의 퇴사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결혼을 앞둔 주인공 형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기에 모두 나의 퇴사 이야기만 했다. 모임의 주최자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아이를 낳은 동기의 한숨 섞인 부러움의 표시는 그 누구보다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고기를 먹으며 대화를 이어가던 중, 그날의 진짜 주인공인 동기 형이 도착했다. 나는 '형 결혼 축하해요~'라는 말로 반겼고, '어 그래 고마워'라는 대답 뒤에 돌아오는 말은 '근데 너 퇴사한다며?'였다. 기-승-전-'퇴사'였다. 결혼을 앞둔 형은 오랜 연애 끝에 하는 결혼이었기에 놀랄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별말 없던 나의 퇴사가 더 이야깃거리였다. 

어깨에 새로운 짐을 지어야 하는 형과 그나마 있던 짐조차 놓아버리고 떠나려는 나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서로의 기분을 알 턱이 없었다. 예전에 미드 '프렌즈'에서 '임산부의 출산의 고통과 남자가 거시기를 세게 걷어 차이는 고통, 이 둘 중 어느 게 더 고통스러울까?'라는 질문을 던지던 챈들러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만큼 나와 형은 다른 길 앞에 서 있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입장에 놓인 두 사람이 주축이 된 모임은 1차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배는 점점 꽉 차가고 술도 어느 정도 오를 무렵, 동기 한 명이 쇼핑백을 꺼냈다. 퇴사 선물이라며 동기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 셔츠 한 벌을 사 줬던 것. 선물을 주기 전에 떡밥들을 너무 흘려줬어서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너무 고마운 선물이었다. 이렇게 돈 모아 선물해주는 동기들이 내 곁에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기에, '남는 건 동기들뿐이다.'라는 말에 의문만을 가졌던 나였기에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반대로 다른 친구가 퇴사한다면 난 이런 선물을 준비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그렇게 밉상은 아니었구나.'라는 일종의 안도감 또한 들었다.

이후 더 많은 동기들을 보게 된 것은 회식의 진짜 주인공이었던 동기 형의 결혼식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동기들이 모였고, 이중엔 나보다 먼저 퇴사를 경험한 사람이 2명이나 있었다. 

한번 퇴사한 후 다른 계열사로 재취업을 한 동기는 정말 자신의 일처럼 뭔가를 이야기해 주고 싶어 했다. 회사 밖의 현실을 경험해 봤기에 더 본인의 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퇴사를 한지 얼마 안 된 동기 형 한 명은 사업을 한창 준비 중이었고, 사업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적어도 이 2명은 나에게 부러움을 표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둘의 반응을 보니 진짜 내가 큰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회장에서 식사를 다 마치고 헤어질 때가 되니, 이제 진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 동기 2명과는 차를 마시러 가서 대화를 더 이어갔지만, 이 또한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아 귀찮게도 느껴졌던 결혼식들이,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동기들과의 티타임이 회사와의 인연이 끊어진다고 하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내가 그들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갑자기 들었다.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른 분야에서, 동기들과 함께 했던 시절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 동기들에게 '그때 퇴사하길 잘했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을 과연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순간 내 마음을 괴롭혔다. 현재로서는 그들이 나를 부러워하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들을 부러워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불편하기도. 그런데 잠시 화장실을 가서 자리를 비웠을 때 미리 계산을 해 놓은 동기의 모습을 보니, '남는 건 동기들뿐이구나.'라는 말이 갑자기 옳게 느껴졌고, 이 깨달음이 나의 불안감을 잠시 동안 지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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