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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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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19. 2016

퇴사 일기 19. 집으로 (1)

모든 게 마지막.

마지막 출근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퇴사일인 3월 15일의 하루 전날인 3월 14일까지 회사 기숙사에 머물던 나의 생활은 아래와 같다.

1) 알람 안 맞춰 놓기 
-원래 난 4~5개의 시간에 알람을 맞춰 놓았었다. 6시 50분, 6시 55분, 7시, 7시 30분, 이런 식으로 5분 단위로 알람 시간을 맞춰 놓고, 아예 못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30분이 더 지난 시간에 한 번 더 알람을 맞춰 놓았다. 덕분에 회사 다니는 동안 지각은 한 번도 안 했다. 즉, 알람을 안 맞춘다는 것은 해방감을 느끼는 가장 첫 번째 수단이기도 했다.

2) 느지막이 식당으로 가 조식 먹기
-건강이 안 좋았던 상황이기에 삼시 세 끼는 다 챙겨 먹고자 했다. 대신 알람 안 맞춰 놓고 일어났기에 늦게 조식을 해결하러 가는 편이었고, 조식 마감인 9시 30분 가까이에 기숙사 식당에 도착하여 밥을 먹곤 했다. 공짜밥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을 하니 그동안 맛없다며 투덜댔던 시절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3) 출근하는 사람들 지켜보기
-자율 출근제를 시행하던 회사였기에 늦은 시각에도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조식을 위해 식당을 오가던 길에 수많은 출근자들을 볼 수 있었고 평소와 달리 유심히 지켜보게 됐다.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트레이닝 복 차림의 내 모습을 비교하며, '아직도 출근 같은 거 하니?'하며 속으로 혼자 흐뭇해하기도 했다.

4) 대낮에 극장 가서 영화 보기
-평일 휴무에 자주 하던 것이지만, 매일 대낮에 극장에 가 영화를 볼 수 있는 게 참 좋았다. 하루에 영화 2개씩 보기도 했는데 눈이 아픈 건지 머리가 아픈 건지, '이제 영화 2편 연달아 보는 것도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은근슬쩍 내 나이를 탓하기도 했다. 또한, 극장을 오가며 핸드폰으로 혹은 기숙사 TV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경기를 보기도 했다.

5) 사람 만나기
-저녁은 대부분 사람들 만나는 일로 채웠다. 저녁 식사뿐 아니라 오후 10시에야 끝나는 오후 근무자 친구들과 야식을 먹기도 했다. '쉬니까 좋아요?'라는 질문에 '요즘 배가 안 아프던데.'라는 대답을 했고, 다음날 출근을 걱정하는 친구들에겐 '난 알람 안 맞춰 놓고 잔다.'라는 말을 해 주며 샘나게 했다.

이렇게 2주 정도의 시간을 기숙사에서 보내고 3월 13일(일요일)에 기숙사의 모든 짐을 빼기 위해 차를 갖고 내려왔다. 미리 싸놓기도 하고 많이 버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짐이 많던지 차에 짐을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나지 않았다. 거의 2시간 동안의 짐 정리를 끝내고 엄마와 회사 근처의 소고기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다 먹은 후 회사 앞 상권 지역을 잠시 산책했다. 늘 오던 곳이라 별것 아닌 곳이라며 폄하하던 장소인데, 나름 소셜커머스 사이트에 관광 상품이 나오기도 하던 곳이다. 엄마와 한 20분쯤 둘러보며 그동안 한 번도 못 본 풍경들을 보기도 했다. 떠날 때가 되니 평소엔 안 보이던 게 막 보였던 것 같다.

짐을 실은 차는 엄마가 갖고 올라갔다. 나는 다음 날인 월요일에 기숙사 퇴실을 위한 방 검사를 받고 사원증을 반납할 예정이었다. 컴퓨터를 실어 보내고 나니 방에서는 할 일이 없었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는데,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별다를 것 없는 밤에 '마지막 밤'이라는 의미를 붙이며 골똘히 생각을 했을 법도 한데, 별다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퇴사를 준비하는 기간이 꽤 길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별다를 것 없이 하루를 시작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기숙사 방에 돌아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텅 비어버린 내 방이라는 점. 아파트 형식으로 된 기숙사는 공동 구역인 거실, 부엌, 화장실(2개)과 개인 공간인 방 3개로 이뤄져 있었다. 한 방엔 2명씩 배정이 되었는데, 나의 룸메이트는 결혼을 위해 나가 지냈던 터라 나 혼자 쓰고 있었다. 나의 물건으로 가득 찼던 방에서 나의 물건들을 다 빼고 나니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됐다. 이 텅 빈 방을 얼른 기숙사 관리 사원('동장'이라고 불렀다.) 에게 보여주고 퇴실을 하고 싶었지만, 기숙사 전 세대원을 상대하는 그들은 꽤나 바빴다. 그래서 오후 4시쯤이 돼서야 동장을 겨우 만날 수 있었고, 방의 청소 상태 등을 확인받았다.

방을 확인받고 동장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동장은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그런데 왜 퇴사하시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너무나도 많이 답한 거라 입이 아플 정도였고 어차피 다시는 못 볼 사람이라 생각돼서 대충 대답을 했다. 그리고 몇 마디 더 이어가다 보니 그는 나와 같은 동네 출신이었다. 입사 연도는 2015년으로, 입사한 지 1년 정도 된 직원이었다. 그런데 나의 퇴사에 대해 너무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눈치였다. 내가 6층에 살았기에 망정이지, 15층에 살았다면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는 동안 퇴사 상담을 해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한편으론 '내가 1년 차 땐 어땠었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1년 차든 5년 차든 20년 차든, 모두 같은 마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숙사 퇴실 절차를 모두 밟은 나는 회사로 향했다. 기숙사에서 회사 사무실까진 도보 20분 정도의 거리. 길을 걸으며 난 계속 하나하나에 마지막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마지막 북문 게이트 통과', '마지막 건물 로비 게이트 통과', '마지막 화장실 출입' 등등, 6년 가까이 지겹게 걷던 그 길에 '마지막'이란 딱지를 계속 붙여대며 퇴사를 실감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내가 직접 정리했던 나의 자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주위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풍경이었지만, 텅 비어 있는 내 자리만큼은 유독 달라져 있었다. 아니, 달라 보였던 것 같다.

순간 느낀 자리에 대한 어색함을 뒤로하고 부서원들과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농담 가득한 대화를 나눴다. 여전히 술잔 들이키는 손짓을 하며 회식 가자는 선배들이 있었고, 날 반기면서도 대화 한마디 제대로 못 나눈 채 회의를 위해 부리나케 걸어가던 책임도 볼 수 있었다. 그룹장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우리 부서 쪽에 왔다가 나를 보고는 '나중에 미국 가면 맛있는 거 사줘라.'라며 가벼운 농담을 인사 대신 건넸고, 부서 여기저기에서는 업무로 바쁜 이들이 여전히 가득했다.

그렇게 내 자리 빼고는 변한 것 하나 없는 부서 이곳저곳을 돌며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직급과 업무의 차이로 인해 늘 서먹했던 친구는 수고했다며 안아주기도 했고, 한참을 떠나 있다 다시 돌아온 차장 한 분은 '그동안 힘들었구나?'라고 말하며, 처음 보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부서로 온 지 얼마 안 된 여사원 친구에겐 '오늘 처음으로 말 섞는 거 같은데, 그게 퇴사 인사네요.'라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가볍게 건넸고, 그 외엔 '안녕히 계세요~수고하세요~'등의 말만 반복했던 것 같다.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도중, 나와 입사 초기에 함께 일하던 책임을 만났다. 굉장히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로 입사 초기에 나의 실수 등을 여러 번 지적하고 혼냈던 분이라 조금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분이지만, 밝은 미소로 날 대해 주었다. 당시에 그분이 통화 중이었기에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악수와 미소만으로 모든 대화를 마친 느낌이었다. 까다로운 상사가 아닌 그냥 '아는 형님'이 되는 순간이었고 안 좋은 기억은 모두 사라져 갔다.

건물을 빠져나가 회사 정문으로 가서 사원증을 반납했다. 시간이 조금 더 늦었다면 그다음 날 다시 와서 반납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골인하여 성공적으로 사원증 반납을 마쳤고, '마지막 정문 게이트 통과'를 거행했다. 이제 진짜, 진짜 끝이었다.

게이트를 통과하고 퇴근 버스를 타러 가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0.1초 만에 누군지 떠오른 나는 말을 걸었다.

"어 형~ 오랜만이에요"
"어 그래. 잘 있었어?"
"아 네. 형 저 퇴사해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어? 왜? 힘들었구나?"
"아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나중에 와서 연락해. 소주 한잔하자."

이 짧은 대화를 나눈 사람은, 내가 2014년에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만난 형이었다. 민박집에서 같은 방에 묵게 됐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우리 회사의 협력업체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네 회사 자주 가니까 한번 보자.'라던 약속이 무려 1년 4개월 만에 우연히 실현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회사를 떠나는 순간 그 형을 보게 된 건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연이 반복되던 만남이었으니 더 그랬고, '헤어짐 뒤에 다가오는 새로운 만남' 같은 거창한 의미를 두게 됐다.

잠깐의 반가운 만남을 마치고 퇴근 버스에 올라탔다. 사원증을 찍고 타야 하는 버스이지만 이미 사원증을 반납한 나는 '제가 사원증을 안 갖고 와서요.'라고 말했고, 기사님은 얼른 그냥 타라며 손짓했다. 퇴사해서 사원증 반납했다고 하면 안태워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순간 사원증을 안 갖고 왔다고 둘러댔었는데, 이름, 사번, 소속 등을 적어냈던 이전의 경험과 다르게 그냥 탈 수 있어서 더 반가웠던 마지막 버스 탑승이었다. 그렇게 난 별다른 지체 없이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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