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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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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19. 2016

퇴사 일기 20. 집으로 (2)

허전한 마음

마지막이었던 서울행 퇴근 버스에서 내린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만큼을 더 가야 우리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고 지겨운 길이지만, 그것도 마지막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강남역에서 2호선을 타고 4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동대문 역사공원 역으로 향하는 길은 매번 가던 길이었지만 새롭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오는 마지막 길이니 다르게 느껴졌나 보다. 또한, 뭔가 모를 허전함도 밀려왔다.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휴대폰에 설치된 회사 메신저를 켰다. 그리고 접속되어 있는 사람들 중 인사 못 나눈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그동안 수고했다.'라는 내용의 답을 받을 때마다 '내가 진짜 그동안 수고한 게 맞나?'라는 반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기도 하고, '수고하세요.'라는, 늘 하던 답을 상대방에게 했다. 수고하라는 말 말고 다른 특별한 작별 인사를 하기엔 조금 쑥스러웠던 것 같다.

엄마는 퇴사를 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 저녁밥을 차려놨다. 늘 먹던 저녁밥 또한 다르게 느껴졌다.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됐다. 내가 회사를 나오며 지나온 모든 행보에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붙였던 것처럼, 이제는 모든 것에 '처음'이라는 의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퇴사 후 '첫 지하철 탑승', '첫 저녁밥상' 등등. 모든 것에 '첫'이란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은 이제 모두 새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4일에 집으로 완전히 올라왔지만, 정식 퇴사 일은 15일이었기에 나에겐 다음날 밤 12시가 되기 전까진 소속이란 게 있었다. 그리고 퇴사 처리 직전 날 밤을 집에서 맡게 된 나는 계속되는 허전한 마음에 뭔가를 페이스북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아랫글은 2016년 3월 14일, 화이트데이보다는 퇴사 직전 날이라는 의미가 훨씬 컸던, 집으로 완전히 돌아온 그날 밤에 페이스북에 써 놓은 글이다.



원래 여행 사진 빼곤 페북에 업뎃한 게 없지만...
이제 소속이 없는 사람이 되는지라 몇 자 끄적끄적...

그렇게 밉기만 하던 회사였지만, 그래도 한때는 '날 뽑아준 회사'라는 것에 감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면접 합격 여부 확인하며 '완성된 퍼즐'모양을 보고 미친놈처럼 집안에서 소리를 질렀었고, 혹시나 건강 검진에서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검사 하나하나 할 때마다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리고 합격이 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서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사람들의 축하가 이어지고, 같이 수영을 배우던 사람들은 나를 '어이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분들은 내 이름은 몰라도 아직 입사도 안 한 내 회사 이름은 알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나의 합격으로 인해 집안 분위기도 좋아지던 것이었다. 부모 마음이 다 똑같다고, 묻지도 않은 아들의 소식을 여기저기 전하며 다니셨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들어온 회사는, 연수 때까지만 해도 엄지척할 만큼의 시스템과 스케일을 보여줬다. 손에 하나씩 쥐여준 넷북을 통해 진행되던 교육들, 어떻게 저렇게 사람들 앞에서 말을 유하게 잘하나 싶던 회사 선배, 타이트하긴 했지만 뭔가 체계적이었던 스케줄 등. 교육생 신분이었지만, 뭔가 된 듯한 느낌이었고, 외부 사람들에게 연수 시스템을 이야기해 주고, 막 자랑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그땐 그랬었다.

연수를 하나하나 마쳤고, 부서를 배치받게 되었다. '기계과 쪽 애들은 뭐 거의 개발 쪽에 자리가 있다던데'라는 말에 아무런 준비하지 않고 있다 얻어맞은 제조행 통보... 그래도 당시엔 별 걱정하지 않았었다. 나는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라는 초긍정 마인드로 받아들였으나, 주변의 동기들은 하나둘씩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쌍한 취급을 당했어도 그리 걱정은 안 했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부서 배치를 받았고 내가 일 할 곳이 정해졌는데, 그 과정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름의 가나다순에 의해 라인이 정해졌었고, '자동차과를 나왔으니 기계가 많은 *** 공정으로 가라'라는 어이없는 한 마디에 부서로 오게 됐었다. 부서 배치에 영향을 끼친 키워드는 '가나다순'과 '기계', 단 2개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흘러 흘러가게 된 부서는, 미리 휴무를 정해야 하는, '근무표'라는 걸 짜야하는 곳이었다. 부서에 간 첫 주에는 토일 이틀을 다 쉬었는데, 그다음 주부터는 예외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채 앉아 시간을 때웠었는데, 시간 날 때 나를 불러 뭔가를 알려주고, 뭔가를 시켜주는 선배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후에 2달 정도 설비 시프트를 돌았다. 부서장은 비실 비실해 보였던 내가 야간근무는 잘 버틸까 하는 걱정을 했고, 원래 야행성인 나는 그런 걱정엔 속으로 코웃음을 쳤었다.

짧은 설비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공정으로 돌아와 일을 했고,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라인 이동이나 업무 변경 없이 같은 위치에서 일을 했다.

중간에 부서가 옮겨지거나, 업무가 바뀌면 새로운 적응이 필요해서 '저런 이동의 대상이 나는 아니길'하고 바라며 있었는데, 그런 마음이 지금의 나태하고 발전 없는 나를 만든 것 같다. 일은 열심히 했다기보단 그냥 버틴 수준이고, 기숙사로 돌아가선 TV 만 줄곧 보다 잠들곤 했다. 책 한 권 끝까지 제대로 읽은 적이 없고, 운동도 꾸준히 해 본 적이 없으며, 인터넷 강의 신청해 놓고 다 못 들어서 급여 공제되기 일쑤였다. 뭔가 목표 하나 잡고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생활이 퇴직의 첫 번째 이유가 된 것 같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계속하고 있기엔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거기에 회사는 갈수록 헬이 되어 갔다. 갈팡질팡하는 상부의 결정 덕에 했던 일을 다시 반복해야 되는 경우가 계속 늘어났고, 이에 발맞춰 모든 일의 절차들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회사에 감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던 나는 불만투성이에 욕쟁이가 되어버렸다. 또한, 내 마음은 회사 밖으로 향해 있었다.

blah... blah...
사실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던 건 아닌데, 쓰다 보니 무슨 연대기 식의 글이 되어 버렸다.;; 뭔가 허전한 마음에 쓰기 시작한 건데, 허전할 겨를이 없는 빼곡한 글이 된...ㄷ;
어제 완전히 집으로 돌아오며, 뭔가 허전한 마음에 인사 못한 사람들에게 메신저를 보내며 채팅을 이어 갔었다. 결국 집밥을 먹으며 마음을 달랬지만...
내일은 뭘 할까라는 팔자 좋은 고민도 하고.
회사 처음 합격했을 때처럼 얼굴이 핀다는 소리도 듣고.
여하튼 이래저래 기분을 알 수가 없고만.ㅋㅋ.



글을 쓰고 나서 '후련하다'라는 감정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분명 난 답답한 마음에 쓰기 시작한 것이고, 그 답답한 마음이 조금 사라진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글을 쓴 다음날 아침,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좋아요'와 댓글들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 내가 올리던 사진이나 게시물에 비해 훨씬 많은 반응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던 반응은 '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라는 댓글들이었다. 같은 회사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만 그런 회사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이다. 회사 생활하는 동안 그런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함께 공유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물론 퇴사한 마당엔 하나 마나 한 상상이지만.

이전까진 속마음이나 나의 의견 등을 페이스북에 올려본 일이 없었다. 가끔 좋아하는 노래나 스포츠 영상을 공유했고, 대부분을 여행 사진들로 가득 채웠었다. 내 얼굴은 하나 안 나오는, 오직 풍경만이 가득한 그런 사진첩들이었다. 그런데 퇴사 심경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정말 난 솔직하게 썼을 뿐인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그 '솔직한' 이야기가 가장 사람들이 원하고, 공감할 만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퇴사 일기'라는 걸 써보자고 마음먹었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손가락 잠깐 움직여 힘들이지 않고 누르는, 그 별것 아닌 것 같았던 '좋아요'와 댓글들이 나에겐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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