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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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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20. 2016

퇴사 일기 21. 퇴사 당일

회사 생각?

퇴사 날짜였던 3월 15일의 아침은 집에서 맞이했다. 더 이상 회사를 가거나 별도의 연락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저 갑자기 아파서 못 갈 것 같은데요.', '눈이 많이 와서 늦을 것 같은데요.' 같은 핑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회사 다니는 동안 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알람 없이 일어나는 아침은 앞으로 계속되리라.


하지만 알람이 없이도 눈이 일찍이 떠졌다. 회사 다닐 땐 그렇게 아침에 피곤하더니 퇴사하니 되려 눈이 저절로 떠졌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각성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온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일찍 일어난 건지? 답은 바로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잠자리가 바뀐 것 + 자유인이 된 것, 이 두 가지가 아침잠을 달아나게 한 것 같았다. 새로운 시작은 적어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보다는 새소리 들리는 아침이 더 어울린다는 일종의 강박이 내 무의식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무엇이든 시작을 할 땐 나름 열심히 했던 나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머리 싸매고 씨름하던 '수학의 정석'책의 맨 앞부분인 '집합'챕터 부분만 시꺼멓게 변해있던걸 봐도 그렇다.(나만 그랬던 건 아닐 듯)


어쨌든 아주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동네에 있는 3,800원짜리 콩나물 해장국집에 들러 아침밥을 먹었다. 지금 시대에 3,800원이란 가격에 밥을 한 끼 먹는다는 건 매우 적은 돈을 쓰는 것이지만, 회사 생활하면서 먹었던 공짜밥들을 생각하니 괜히 아깝게 느껴졌다. 회사 떠난 지 하루 만에 회사가 생각날 줄이야. '오늘은 대체 뭘 먹어야 되는 거냐?'라며 메뉴 투정 부렸던 회사 식단이 은근히 괜찮은 구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미 회사를 나왔다.', '어차피 다시 돌아가서 먹으면 또다시 투정 부릴 것이다.'라는 두 가지 마음이 회사 생각을 그만하게끔 만들었다.


아침은 훌륭하게 해결했고...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 것인가? 영화 감상, 운전연습, 독서. 이 3가지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평일 오전이나 대낮에 사람 별로 없는 상영관에 앉아 홀로 영화를 보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였고, 회사를 다니던 동안에도 많이 하던 행동이다. 내 생활에 별로 비중이 없던 것들은 운전과 독서. 34살이 되도록 운전에 자신이 없던 나는 전년도에 사촌누나로부터 구입한 차가 있었지만, 회사에서는 필요 없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차를 맡겨뒀었다. 그래서 주말에만 조금씩 운전했었는데 이젠 마음껏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독서는 운전연습과 마찬가지로 억지로라도 해 버릇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퇴사 당일 오전은 운전연습으로 채웠다. 오후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신용카드 이용 내역을 살펴보니 '한국철도공사 14,100원'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회사 가는 KTX 가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결제 취소 내역과 서울역에 위치한 식당에서의 결제 내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회사 사람들이 회식하는데 오지 않겠냐고 물어서 가겠다고 답하고 표까지 사서 서울역까지 갔다가 시간이 조금 안 맞아 취소하고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저녁은 먹어야 하니 서울역에서 먹었던 것이고. 6,500원이 긁혀있는 걸 보니 아마 서울역 2층 푸드코트에서 그릇을 반 나눠 파는 '짜장면+탕수육' 메뉴를 먹지 않았을까 싶다. 난 늘 먹던 걸 먹는 편이니까.


어쨌든 퇴사 당일의 하루는 위에 써놓은 대로 별거 없이 흘러갔던 것 같다. 운전연습 덕에 나름 의미 있었던 오전 시간과 별 소득 없이 왔다 갔다 하며 시간만 쓴 오후, 그리고 밥을 사 먹으며 쓰게 됐던 그 몇천 원들과 그 몇천 원들 때문에 생각났던 회사 식당. 해시태그라도 붙여서 '#퇴사당일, #운전연습, #몇천 원, #회사 식당' 이런 항목들을 적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얼마나 웃길까? 이런 생각 자체에 스스로 코웃음을 쳤던 동시에 회사가 몇 번이나 떠올랐던 퇴사 당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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