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괜찮나...
D-Day였던 3월 15일이 지나고 드디어 난 소속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토록 원한 자유였으니 이제 즐길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쏟아진 자유와 시간은 생각보다 컨트롤이 어려웠다.
회사 다닐 때 휴무에 내가 하던 것들은 i)영화 감상, ii)쇼핑, iii)전시회 관람, iv)친구 만나기, v)가족과 시간 보내기 등이었다. i)~iii) 항목은 다 혼자 하던 것들로, 평일 휴무에 주로 하던 것들이다.
영화는 보면 볼수록 봐야 할 영화가 늘어나 언젠가부터 혼자 보기 시작했다. 흥행 1,2 위를 다투는 대작들부터 다양성 영화로 분류되는, 상영관이 많지 않은 영화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 관람'한다는 것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고, '이 영화는 꼭 봐야 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 결과 어느덧 CGV RVIP가 되었고 아무렇지 않게 혼자 극장에 가는 나름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쇼핑은 하루 '날 잡고' 해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기에, 한 번 하면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편이다. 주로 옷을 사는 쇼핑이었는데, 여러 매장에 가서 입어 보고 몇몇 후보군을 정해 놓은 다음, 어떠한 옷을 사기로 마음먹으면 최종적으로 인터넷 판매가를 검색해서 비교한 후에 사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이나 아울렛에 가서 입어보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동일한 제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적도 매우 많았다. 이런 과정들을 다 거쳐 쇼핑을 하면 4~5시간 정도 걸렸기에, 이 또한 누군가와 함께하기엔 좀 불편했다.
전시회 관람은 회사를 다니며 갖게 된 취미였다. 평일 휴무를 뭘로 채울까를 고민하다 인터넷에서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전'이라는 전시회를 발견하고 무작정 가게 되었는데, 당시 예술의 전당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내가 그동안 모르던, 전혀 다른 세상에 온듯했으며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여유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Life 사진전'이 전시회 관람을 취미로 갖게 된 계기였다. 당시 굉장히 어렸던 여학생이 도슨트를 맡았었는데, 막힘없이 줄줄 나오던 사진 설명과 뒷이야기 들을 들으며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라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그 후로 큰 전시회들은 빠짐없이 갔던 것 같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한번 보고 난 후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또 한번 보게 되면 총 2~3시간이 훌쩍 흘렀다.
이 세 가지의 취미가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분명했다. 찌든 회사 생활 중간중간의 활력소였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나니 모든 일상을 저 세 가지로 채우기엔 너무도 버거웠다. 영화는 많이 봐야 하루에 두 편 정도였고, 매일 쇼핑을 할 이유도 없거니와 수입이 끊긴 상태이기에 쇼핑은 오히려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전시회 관람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지 매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보니 뭔가 할 것을 더 만들어야 했다. 취업 전에 배워두었던 수영이 그중 하나였다. 취업이 확정되고 입사를 하기까지 두 달 정도 시간이 있었기에 수영 강습을 받을 수 있었다. 취업 전에 배웠던 수영을 퇴사 후에 다시 시작하게 되니 나의 회사 생활은 수영으로 시작해서 수영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억지로 독서를 시작했다. 군 시절 '책 100권 읽기'라는 목표를 가까스로 달성한 이후 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는데, 독서는 억지로라도 습관을 들여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는 제대로 읽히지 않아 도서관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수영장과 열람실이 함께 있던 구청 시설은 나에게 정말 안성맞춤 같은 장소였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곤 했다.
그리하여 나는 영화 감상, 전시회 관람, 수영, 독서 등의 네 가지 항목들로 나의 일상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건 대부분 저녁이나 주말에 이루어졌기에 평일 낮의 시간은 내가 홀로 채워갈 수밖에 없었다. 가끔 엄마와 운전연습차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했지만, 내가 혼자 있는 시간들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시간이었다.
하루 24시간 중 회사에 있던 시간을 빼고 나니 정말 한가로웠지만,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늦잠을 자선 안됐고 나름의 하루 일과를 정해 놓고 움직여야만 뭔가 꽉 찬 하루가 완성되는 것 같았다. '아 귀찮아'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하루 일과가 모두 어긋나 버리는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며칠뿐. 언젠가부터 나의 기상시간은 점점 늦어졌으며 집 밖으로 나가는 시간 또한 늦어졌다. 매일이라도 볼 것 같던 영화는 회사 다닐 때보다 조금 더 보는 수준이었고, 전시회는 2주에 한 개 정도 봤다. 수영은 어느 순간 찾아온 어깨의 통증으로 인해 많이 할 수 없었으며, 도서관에 가면 책을 보다가도 야구 경기가 궁금해 인터넷으로 중계를 보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조금씩 흐트러졌다.
이 흐트러진 일상 때문에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걱정을 하다가 문득,
'이제 걱정 좀 그만하면서 살자며 회사를 뛰쳐나왔는데 자유시간에도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걱정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난 마음을 고쳐먹고, '어차피 쉬기 위해 뛰쳐나온 건데!'하며 마음껏 쉬어보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금, 아니 매우 많이 흐트러져도 '괜찮아...괜찮아...' 외치며 작정하고 쉬어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