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할 뻔
퇴사를 열흘 정도 앞둔 시점,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저께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주먹만 한 혹이 생겼어. 꿈꾸다 떨어졌는데 다른 데는 괜찮아. 큰일 날뻔했어. 오늘 병원 가서 머리 엑스레이 찍었는데 뼈는 괜찮데. 놀라서 목 주위가 약간 아프고 머리가 띵해. 약 3일 처방해줘서 먹어보고 좀 이상하면 큰 병원 가보려고~ 괜찮겠지. 놀랄까 봐 얘기 안 하려 했는데 괜찮다 해서~'
엄마는 한 30년째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 이젠 옆에서 잠을 안 잔 지가 오래되었지만, 가끔 같은 방에서 자게 되면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지만, 침대에서 떨어져 혹이 났다는 사실에는 매우 놀랐다. 어떻게 보면 여태 침대에서 안 떨어진 게 이상할 정도이지만.
그런데 그 카톡을 보자마자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괜히 퇴사하는 건가...?'
였다. 집에 아픈 사람 없는 게 내가 퇴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왔는데, 갑자기 아픈 사람이 생겨 급전이 필요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의 퇴사에 물음표를 달게 했다.
동기의 결혼식 후 회사 동기들과 시간을 보내던 나는 카톡을 본 후 바로 엄마에게로 향했다. 미국에 있는 누나에게서도 잘 좀 살펴보라는 카톡이 왔다. 내가 본다고 뭔가 새로운 걸 알 순 없지만, 그래도 직접 엄마를 만나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나는 직접 볼 수 없으니 나에게라도 카톡을 보낸 것이고.
엄마의 가게에 도착한 후 엄마를 보자마자 특이점이 있나 살폈다. 머리의 혹 부분을 만져보기도 하고 속이 매스껍거나 머리가 계속 어지럽진 않은지 등등을 물어봤다. 엄마는 침대에서 떨어진 당일에는 구토를 했고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으나, 이틀이 지난 지금은 괜찮다는 이야기를 했다. 가벼운 뇌진탕 증세가 잠시 있었다는 것.
일단 안도했지만 나이 60이 넘은 사람이 주먹만 한 혹을 달 정도로 머리에 충격을 받았으니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보다 엄마가 더 적극적으로 방법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동안 보험료 납부한 걸 이제야 활용한다.'는 느낌으로 병원 검사를 미리 알아봐 놓은 것이었다.
엄마는 이미 MRI 촬영 날짜를 잡아 놓은 상태였다. 처음엔 굳이 'MRI까지 찍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보험처리도 다 되니 확실하게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온 가족이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검사 자체보다는 검사를 통해 안심을 얻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며칠 후 엄마는 MRI 촬영을 위해 입원을 했다. MRI 잠깐 찍고 나오는 건데 뭘 입원까지 하나 했지만, 보험처리 시에는 그렇게들 한다고 한다. 엄마는 혼자 병원에 가 이미 입원을 해 놓은 상태였고 나는 엄마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병원에 있던 엄마는 KFC의 치킨 두 조각과 코울슬로가 먹고 싶다고 했다. 어차피 MRI가 목적인 사람이 굳이 담백하기만 한 병원 밥을 꼭 먹을 필요는 없었다. 난 병원으로 가는 도중 KFC에 들르기 위해 어떤 정거장에서 내렸는데, 그곳의 KFC는 다른 상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휴대폰 판매점으로 바뀌어 있었고, 언제 바뀌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각나기 전에 다른 KFC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오던 동네인데 사라진 흔적도 없이 이미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회사의 내 자리도 어느샌가 그렇게 아무 일 없던 듯이 채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다른 KFC 지점에 들러 엄마의 주문대로 음식을 산 후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1층으로 내려온 엄마에게 안 해도 될 '가려던 KFC가 없어져서 다른 지점 가서 사 왔어.'란 이야기를 하며 치킨 봉투를 건넸다. '아이고 그럼 그냥 오지.'란 엄마의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어쨌든 엄마는 내가 은연중에 원한 대답을 곧바로 해 주었다. 그 대답을 들으니 내가 뭐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병원에 있었던 시간은 매우 짧았다. 큰 병 때문에 온 게 아니기에, 그리고 엄마의 가게로 가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와야 했기에 그랬다. 하지만 병원을 오가며 환자복 입은 엄마의 모습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괜찮겠지? 아니면 혹시 머리에 뭔가가 발견되는 건 아닌가? 아니면 우연히 다른 질병이 발견될지도? 그렇게 되면 난 곧바로 회사에 퇴사 번복을? 내가 퇴사 번복하면 회사에서 곱게 받아줄까? 퇴사 못하게 하려고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진 건가? 회사로 돌아가면 그냥 철판 깔고 다녀야겠네...'
어느덧 엄마 걱정보단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엄마는 MRI를 찍고 퇴원을 했다.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는 맹장 수술을 한 여성이었는데, 내가 사 간 치킨을 엄마가 아주 작게 찢어 줬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여성은 구토를 하기 위해 화장실을 오갔다고...
이런 에피소드 외에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검사 결과도 특이사항이 없다고 했다. 회사에서 불량 해결을 위해 샘플 만들어 분석 맡기면 항상 똑같이 돌아오던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말. 그 똑같던 답변들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 늘 답답했었는데, 엄마의 검사 때만큼은 얼마나 반갑던지.
정확히 언제가 시작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30년은 된듯한 엄마의 악몽. 그로 인해 겸사겸사하게 됐던 MRI 검사와 입원.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엄마. 언젠가는 다시 입을 수도 있는 게 환자복이지만,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게 바로 환자복 입은 엄마의 모습이란 걸 알게 된 경험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아프지 않은 것도 중요하지만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게 더 먼저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오래가진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