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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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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01. 2016

퇴사 일기 5. 커피 타임

형식적이지 않았던 고과 면담

동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2015년 12월의 어느 날.


부서의 모 책임(과장~차장급)이 갑자기 나를 따로 불렀다. 오후 4시쯤이었는데, 별로 놀랍지 않았다. 연말이 되면 의례적으로 개별 면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 부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인사 고과 면담은 필수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잠깐 커피 한잔하자."


라는 말과 함께 사무실 복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굉장히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전에도 그런 식으로 면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무실 옆에 있는 카페로 간 후 책임은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에 마셔서 괜찮다며 사양했다. 그땐 정말 그전에 음료수를 마셨기 때문에 사양했던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미안한 말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커피값은 아껴드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은 한 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 난 빈손으로, 조금 걸어간 후 작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건물과 건물을 이어놓은 구름다리의 중간쯤이었고 업무를 위해 직원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곳이었다.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 책임은 '면담하려고 부른 거 알지?'라는 뉘앙스의 말들로 대화를 시작했다. 나 또한 '네 물론 알고 있죠'라는 투의 대답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동안의 면담에서 별 이야기(애로사항, 고민 등)를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당시의 면담도 그저 그런 '근황 토크'가 될 가능성이 컸다. 선 근황 토크, 후 건의사항, 불만사항 접수식으로 가는 게 일반적인 면담이었다. 시작부터 본격적인 면담을 하면 너무 인간미 없으니까.


책임은 아니나 다를까 나의 아이슬란드 여행에 대해 먼저 물었다. 아이슬란드란 나라는 누구에게나 생소할 법한 나라이니 당연히 나올 질문이기도 했다. 근황 토크용으론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소재였고 나도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그곳이 '고민의 땅'이었단 이야기만 빼놓고.


한 10분 정도 이야기를 했을까. 여지없이 이 질문이 나왔다.


"뭐 힘든 건 없지?"


정말 힘든 게 있는지 없는지를 묻기보다는 "네!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다리는 느낌의 물음이었다. 늘 별거 없다고 이야기해 왔던 나였기에.


그런데 그때 난 그 책임을 제외한 다른 사물이나 장소들을 응시하며 


"어... 그게요... 음..."


이렇게 운을 뗀 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일부러 뜸을 들인 게 아니라 정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30초 정도를 말을 잇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 당신께서 빨리 눈치채고 그 단어를 끄집어 달라.'라는 듯이.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으니,


"너 혹시 그만두려고 하나?"


라는 말이, 기다리던 바로 그 질문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2,3초 머뭇거렸을까. "네"라고 짧게 답하고, 가수 비가 된 것 마냥 "습~하~"하는 형태의 호흡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책임은 "아..."라는 탄식 섞인 소리와 함께 뭔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했던 네가~'하는 노래를 BGM으로 깔고 싶을 정도로.


잠깐의 정적이 돈 후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간 것도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간 것이라고(사실 관광의 의미가 더 컸지만). 그곳에 가서 퇴사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했다고(이건 사실). 8월 말쯤 부서와 회사의 업무들이 뒤죽박죽 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민했고, 언제가 될진 모르겠으며, 실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퇴사를 생각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책임은 머리가 아파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이해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도 역시 회사원이니까. 그런데 그의 머리가 아픈 다른 이유는 퇴사를 기정사실화 한 사원이 이미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3년 정도 늦게 들어온 후배였는데, 그는  2016년 초에 퇴사를 하겠다고 알려놓은 상태였다. 그는 '교사'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 보고 싶어 했다.


잠시 그 후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내 이야기로 넘어왔다. 하려고 하는, 하고 싶은 일이 있냐는 것이었다. 난 그게 아직 불투명하기에 확실한 퇴사 시점을 못 잡고 있다고 말했다. 즉, 나는 '언제 퇴사하겠다.'가 아닌, '언젠가 퇴사할 것이다.' 정도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확실하지도 않은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다. 뭐 죄지은 사람처럼 입이 그렇게 안 떨어졌는지.


아무튼 구름다리에서의 대화는 이내 끝이 났다. '사람 일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니까, 일단 퇴사에 대한 뜻은 알아만 두겠다.' 이 정도 뉘앙스의 결론만 남긴 채 자리를 일어나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아이고, 제가 책임님 어깨에 짐을 더 얹어 드렸네요..."


라는 말을 하며 함께 걸어갔다. 저런 말이라도 안 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았다.


"아니다. 뭐 네 인생인데..."


라고 책임은 대답해주었다. 어쩌면 나는 이 말을 듣기 위해 한마디 툭 던진 것도 같았다.


마음이 후련하지는 않았다. '경문왕의 귀 설화'에 나오는 신하는 끝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하며 속이 후련해졌던 걸로 묘사되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와 달리 마음이 오히려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퇴사하게 되는 걸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괜히 일 벌인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군대에서 일병이었을 당시, "야 이렇게 청소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안 들지?"라는 한 상병의 물음에 미친척하고 "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과 비슷했던 것 같다. 괜히 한번 지르고 곧바로 후회하는, 괜한 말을 한 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어쨌든 희미한 퇴사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의 '커피 타임'이 그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게 도와줄 줄은 나도, 책임도, 그 어느 누구도 몰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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