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있는 일상] 등산 #2 : 산과 막걸리의 마리아주
등산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산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맛을 알아버렸다.
난 사실 막걸리를 혐오했다. 학창 시절, 빈대떡과 파전집의 찌그러진 양은사발과 주전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알 수 없는 걸쭉한 맛과 다음날 머리가 깨질듯한 아픔을 주는 막걸리는 자연스레 나와는 상관없는 주종이 되어 버렸다.
작년 이맘때쯤, 처음 등산을 시작할 때, 혼자 느지막이 불암산에 오른 적이 있다. 정상아래 소나무 돌에 걸터앉아 어떤 아저씨가 서울 <장수생막걸리>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힘들게 올라왔는데, 술까지 먹으면 헤롱 대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막걸리는 마시는 것은 위험한 일이긴 하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 알코올을 섭취하게 되면 땀이 많이 나는 등산이라는 운동의 특성으로 인해, 혈중알코올농도가 평소 두배로 올라간다고 한다. 또한 취기로 인한 실족, 낙상 등의 안전사고의 우려도 있다.
나 또한 술을 즐겨하고, 집에 오면 샤워하고 맥주 한 두 캔은 기본인 사람이지만, 굳이 산에까지 막걸리를 싸들고 와서 마셔야 하나 싶었다. 나도 이미 아저씨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막걸리 먹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저씨처럼 보였다. ‘산에서 막걸리 마시는 아저씨는 되지 말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불암산 아저씨가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올해 3월, 아는 사람들 몇몇과 함께 북한산 등산을 하게 되었다. 빈손으로 가긴 애매하고, 또 다른 등산의 필수품인 컵라면을 위해 7명분 뜨거운 물을 싸갈 수도 없었다. 막연히 ‘산에서는 막걸리를 마시니까…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모임이기도 하니…’라고 생각해서, 막걸리를 가져가기로 했다.
D자 형으로 등산가방 모양도 잡아주고, 효율적인 수납을 위한 디팩(D-pack)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30리터 배낭용으로 가로형 디팩을 두 개 정도 넣게 되는데, 14리터 가방용으로 사뒀던 ‘보틀팩’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구매할 당시 상세페이지에 ‘막걸리 세병을 세워서 수납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던 것이 떠올랐다. 이때도, ‘뭐 하러 산에 까지 막걸리를 세병이나 들고 가나’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내가 북한산 등산을 위해 우리 쌀 서울 <장수생막걸리> 3병을 ‘미스터리월 막걸리 전용 보냉백’에 보냉용 얼음까지 넣어 싸들고 갔다.
백운봉암문 가기 전 깔딱 고개 넓적한 바위에서, 후미 그룹을 기다리며 막걸리를 오픈했다. 확 틔인 시야는 없었지만, 딱 그때 먹었던 막걸리처럼 시원하고 청량하며 맛나던 막걸리는 없는 것 같았다. ‘인생막걸리’란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 것처럼. 처음 사본 흰색 ‘우리 쌀’ <장수생막걸리>는 너무나 맛있었다. 그 후, 집에서 비오는 주말에 감자전과 그 막걸리를 마셨다. 아쉽지만, 그 맛은 아니었다.
산에서 마신 그날의 막걸리 한잔 덕에, 막걸리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이것저것 사보고 누룩의 다양한 변주를 즐긴다. <복순도가>, <이화백주>, <마크홀리>, <인생막걸리>, <골목막걸리>, <공주알밤막걸리>, <우곡생주>, <지평막걸리>, <해창막걸리> 그리고 아직까지 마셔봐야 할 막걸리들이 너무도 많다. 몇몇을 마셔보니, 개인적으로는 알싸한 청량감을 주는 탄산과 산미가 살짝 느껴지는 막걸리가 좋다.
봄부터 나의 등산 필수품이 되어버린 막걸리. 정상에서 내려 먹는 드립커피를 위해 샀던 ‘스노우피크 티타늄 더블 머그’는 이제 막걸리의 시원함을 조금이나마 유지해 준다. 정상에서, 전망 좋은 바위에 앉아서, 나무그늘아래서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는 계절을 탄다.
한 겨울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한겨울 눈꽃산행을 간 소백산 능선에서 똥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막걸리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산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제철이 있는 듯하다. 언제까지가 제철일지는 올 가을을 지나 봐야 알 것 같다.
계절과 산에 따라 어울리는 막걸리도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쭉철 소백산에서 마시는 알싸 달달한 <인생막걸리>, 한여름 방태산 이끼계곡에서 마시는 셔벗 같은 <공주알밤막걸리>, 단풍철 설악산에서 마시는 고급스러운 진득함의 <포천담음막걸리>.
계절과 함께 날씨와 온도, 하늘, 구름, 바람, 숲의 냄새, 새소리, 물소리, 산에 있는 모든 것과 내가 흘린 땀, 올라온 고도, 함께하는 사람, 아름다운 조망이, 감각의 총합으로 막걸리에 녹아 내 안으로 들어온다.
산에 갈 때마다 산과 막걸리의 ‘마리아주’를 생각하며, 그 산에 어울리는 막걸리를 짊어지고 간다. 이 막걸리를 따서 한잔 따라 마실 장소를 물색하며, ‘이번엔 어떤 맛을 선사할까?’한껏 기대하며 오늘도 산에 오른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불암산 아저씨.
저도 산에서 막걸리 한잔 하는 아저씨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