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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May 18. 2023

레깅스 입고 등산하는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운동 있는 일상] 등산 #1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는, 산은 그냥 나이 드신 분들이 운동삼아 다니는 곳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젊은 시절의 생각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 나이가 되어 버려 있었다.

  마흔 중반을 넘어섰다.

  이젠, 꽃들이 보이고, 계절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젊었을 때는 몰랐다. 술 마시고, 놀고먹기 바빠서였는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여유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계절의 변화는 단지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작년 6월 5일에 <수락산>으로 첫 등산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32번의 등산을 다녀왔다. 한 달에 3번꼴로 등산을 다닌 셈이다. 어쩌다 갑자기 내 인생에 등산이라는 취미가 들어오게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1년 동안이나 이렇게 취미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인생에서 처음 등산을 시작한 건, 4년 전쯤이다.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과 신년산행을 해본 경험도 각 한번씩은 있었다. 첫 등산 전에 가본 횟수라고는 회사에서 끌려갔던 것까지 해도 다섯 번이 채 되지 않는다.


  여자친구는 산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때때로 등산을 가자고 했다. 그러다 19년 가을, 1000일 기념 등산으로 등린이 1순위, <북한산 원효봉> 코스를 다녀왔다. 등산복이나 이런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러닝 때 입던 나이키를 풀 장착하고 나이키 러닝화를 신고 산에 올랐다. 크로스핏으로 다져진 체력이라 올라가는데 아무 무리가 없었다.

  내려오는 길엔 사뿐사뿐, 무릎에 무리가 안 가게 하산하는 방법을 몰라, 쿵쾅쿵쾅 내려왔다. 다음날 무릎이 끊어질 것 같이 아팠고, 허리는 90kg의 몸무게를 지탱하기 힘들었는지 디스크가 재발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을 물리치료를 받으며, 어그적 어그적 걸으며 다녔다.


  그 뒤로 여자친구는 산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씩, “우리 산에 안 갈래?”라고 넌지시 던지며 물어봤었고, 나는 “지난번에 운동화 신고 가니까, 좀 많이 미끄러워서, 더 긴장해서 허리가 나갔었나 봐”라고 답했다. “내가 등산화 사줄게~! 가자~!” “내 발이 커서 맞는 등산화가 있으려나?”

  찾아간 백화점 아웃도어 매장에 300mm 등산화는 찾을 수 없었다. 또 그렇게 일 이 년이 흘렀다.




  다시 등산얘기를 꺼냈던 작년, 나는 인터넷으로 조금은 적극적으로 등산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생긴 게 너무 다 아저씨스러워 보여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난 누가봐도 아저씨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나이키 마니아인 나는, 나이키 트레일 러닝화라는 것을 사면될 것 같았다. 등산을 잘 몰랐으니, 하이킹이나, 트레킹이나, 트레일 러닝이나, 마운티어링이나, 다 거기서 거기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키 와일드호스7을 신고, 나이키 레깅스에 반바지를 입고, 두 번째로 간 <도봉산 우이암> 코스는 신세계였다. 편안한 느낌과 돌에서도 미끄럽지 않아 불안함 보다는 등산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저씨스러움의 최고봉인, 등산 후 막걸리와 감자전이 주는 맛을 알아버렸다.


  내겐 등산과 아저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퇴직을 하거나 퇴사를 했는데, 집에 얘기도 못하고 아침에 일찍 나와, 차에서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신문하나 들고 산에서 하루를 보내다 오는, 어떤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이키 레깅스를 입고 등산을 다녀온 아저씨인, 나의 등산은 전혀 달랐다. 내로남불처럼. 갈 때마다 늘 새롭고, 힘들고, 맛있고, 기분이 좋다. 주말 하루를 다 쏟아 버리지만,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취미를 즐기는 방법인 ‘등산은 무엇인가?’에 대해 원론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책으로 배우는 스타일의 나는, 일단 교보문고에서 등산책을 검색해 본다. 엄홍길 대장님이 쓴 책도 있고, 브런치스러운 에세이도 있으며, 수도권 가볼 만한 곳, 등산의 모든 기술을 가르쳐 줄 것 같은 책도 있다. 하지만, 뭔가 업데이트가 안된 느낌이었다.


  유튜브를 찾아본다. 등산유튜버라는 사람들도 꽤 많다. 배우 이시영의 등산채널도 있다. 확실히 연예인의 채널을 먼저 클릭하게 된다. 유튜브라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채널들도 꽤 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운영하는 채널은 확실히 세련되어 보인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등산 관련 유튜브를 본다. 유튜브 알고리즘의 늪에 빠져 어떤날엔 히말라야까지 다녀온다.


  네이버 까페를 검색하고 뭔가 활발하고 젊은 듯한 커뮤니티를 찾는다. 등산하는 아저씨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블랙야크 100대 명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앱도 깔고, 집에서 가까운 산부터 하나씩 가본다.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도 신청하고, 그렇게 등산이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여자친구와 주말에 산에 가기로 한 주에, 내가 큰 잘못을 해서 여자친구 심기가 불편했다.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냥 혼자 머리를 식히러 간다고, 반성하러 간다고 <불암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 후 여자친구는 반성했냐고 묻는데,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할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산에 무언가를 생각하러 간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산에 들어서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다음 발을 디딜 곳을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정상에 올라가고 나면, 산멍을 한다. 머리가 비워진다. 맑아진다. 좋다. 그게 다다. 그렇게 산에 푹 빠져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산이 찾아왔다. 나를 불렀다. 나는 내가 광화문 교보문고 잡지 코너에서, 그것도 월간 <산>이라는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게 될 줄 몰랐다. 서점에 가면 나는 일단 눈에 띄는 책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한꺼번에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배송이 오면 비닐만 뜯어 그냥 책장에 꽂아 둔다.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그 책이 갑자기 자기 좀 봐 달라고, 읽어 달라고,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산은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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