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행가 Jan 06. 2019

독일의 경주(慶州) 트리어

트리어(Trier)는 독일 중서부에 있는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이다. 룩셈부르크에 인접한 국경도시로 모젤 강가에 위치해 있다. 트리어는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도시이다. 오랜 역사만큼 시내 곳곳에 로마시대부터 중세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가득하다. 


트리어에는 이미 기원전 7000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많은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원래 켈트족 일족인 트레베러족이 터를 잡고 살고 있던 곳이다. 


트리어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율리우스 시저의 갈리아 정복사업 때문이다. 그는 기원전 58년부터 50년까지 라인강 서부지역인 갈리아를 정복하였다. 이때 트리어도 로마군의 손에 점령당한다. 이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기원전 17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서 시작하는 도로망을 트리어까지 확장하고 모젤강에 다리를 놓는 등 트리어를 본격적으로 개발한다. 이후 트리어는 로마제국의 중요 도시로 성장한다. 


로마시대 많은 건설 토목사업이 이루어졌다. 지금도 남아있는 흔적들은 보면 대단했던 과거의 영화와 로마인의 과학기술을 느낄 수 있다. 시내로 진입하는 다리(dritte Moselbruecke)는 현재도 수천 대의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튼튼하다.  3곳의 공중목욕탕과 1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das Amphitheater), 지금은 없지만 5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차경기장(der Circus)을 지었다. 대부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도시 외곽에 검은 성벽의 일부가 보이는데 이것이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이다. 지어질 당시 6미터 높이에 6.4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이었다.  170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사암을 구리 톱을 사용하여 6톤 무게의 직사각형으로 잘라 벽돌을 만들었다. 모르타르를 쓰지 않고 철제로 고정하고 안에 납을 부어 단단히 고정시키며 성벽을 쌓았다. 검은 성문이란 이름은 자연적인 색의 변화에 대해 중세시대부터 불리어졌다고 한다.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


1030년 그리스 수도사 지메온(Simeon)이 포르타 니그라 동쪽 탑에 살았다. 사후 그가 살던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 덕분에 성벽의 다른 부분은 파괴되었으나 동쪽 입구만은 다행히 남아 있게 되었다. 후에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교회는 철거되고 포르타 니그라는 보존될 수 있었다.


트리어는 로마 제2의 도시로 성장한다. 콘스탄틴 대제(Konstantin der Grosse)는 306년에서 316년까지 이곳을 본거지로 하여 로마제국 쟁탈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로마 황제 발렌티니안(Balentinian)과 그의 아들 그라티안(Gratian)과 발렌티니안 2세(Balentinian II)는 367년에서 390년까지 이곳에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바실리카(Die Basilika)는 콘스탄틴 대제의 알현실이었다. 바실리카는 단일 공간인 커다란 홀로 되어있다. 로마인들이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도로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세로 27.2미터 가로 67미터 높이 33미터로 입구 포함하면 가로 75미터에 달하는 크기이다. 내부는 대리석, 모자이크, 성상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5세기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1614년 트리어 대주교가 복원한 것이다. 

바실리카(Die Basilika)

황제 목욕탕(die Kaiserthermen)은 4세기에 지어졌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큰 로마의 목욕탕이었다. 중세에 사람들이 벽돌을 뜯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폐허로 되어 있다. 온탕실에는 65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찬물을 여섯 보일러실에서 40도까지 데웠다. 그중 세 곳에서 만들어진 온수는 욕탕으로 보내고 한 곳의 물은 바닥을 따뜻하게 하고 나머지 두 곳의 물은 둥근 천장을 따뜻하게 하는데 쓰였다. 당시 로마인의 규모와 기술이 놀랍다.

트리어 대성당(der Trierer Dom)

일찍부터 트리어에는 기독교가 융성하였다. 3세기 후반부터 주교가 있었다. 콘스탄틴 대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기독교인과 트리어 대성당(der Trierer Dom) 건설을 후원하였다. 트리어 대성당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주교성당이다. 


성당은 콘스탄틴 대제의 명령에 의해 어머니 헬레나의 궁전터 위에 지어졌다. 초기의 성당은 4개의 바실리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세기 프랑크족과 9세기 바이킹의 침입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나 바실리카 하나 정도로 성당이 축소되었다. 동쪽 부분은 로마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새로이 추가된 서쪽 부분은 4개의 탑과 원형으로 돌출되어 있다. 내부는 고딕과 바로크 양식 등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개축되었다. 트리어 대성당 안에는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예수가 입었던 성의가 보관되어 있다.

성모성당(die Liebfrauenkirche)

13세기 다른 바실리카 터에 고딕 양식의 원형 성모 성당(die Liebfrauenkirche)이 지어졌다. 그리고 대성당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었다. 두성당은 다른 로마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트리어의 대표적 인물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있다. 그는 1818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2018년 탄생 20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 5.5미터 높이의 동상을 만들어 기증하며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중국 내에서도 크게 행사를 한 것을 뉴스에서 보았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크게 기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 내에서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10월 31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는 등 루터의 열기가 뜨거웠다. 

마르크스 동상


매거진의 이전글 신생도시 카를스루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