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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Jan 07. 2019

돔(Dom)의 도시 쾰른

쾰른은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살고 있는 인구 80만의 독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라인 강을 따라 세워진 도시 중 가장 크다. 라인강은 길이 1,200킬로미터로 북해에서 알프스까지 이어지는 독일 역사에서 굉장한 의미가 있는 강이다. 


한국에서는 독일의 경제부흥을 라인강의 기적이라 하고 우리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며 비교하길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만나 본 독일 사람들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고 하다. 이 말의 출처가 궁금하다. 


쾰른은 로마시대부터 중요 도시였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이다. 쾰른이라는 도시명은 로마시대 식민도시명칭인 CCAA(Colonia Claudia Ara Agrippinensium)에서 유래한다.  이는 쾰른 출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인 아그리피나(Iulia Agrippina, Agrippina die Jüngere, AD 15 추정-59) 황후를 위해 황제명으로 부여된 명칭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기원전 38년 도시를 건설한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쾰른은 라인강 방어선의 중요 거점이었다.


아그리피나는 13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다. 그가 바로 폭군 네로 황제이다. 첫 번째 남편이 죽은 후 재혼을 하지만 그녀는 그를 독살해 죽인다. 권력투쟁의 중심에서 항상 죽음을 맞닥트렸던 그녀는 49세의 나이에 로마 황제이자 숙부인 클라디우스와 결혼한다. 황후가 된 후 그녀의 고향은 콜로니에(Kolonie, CCAA)로 명칭의 바뀌게 된다.  


그녀는 세 번째 남편인 황제를 암살하고 17세의 아들 네로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다. 권력을 장악한 그녀는 불행하게도 아들의 손에 살해된다. 그녀의 이런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이후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어 회자되고 있다 쾰른 사람들은 그녀를 자랑스러워해 곳곳에 그녀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도시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쾰른성당(Kölner Dom)은 가장 눈에 띄는 랜드마크이다. 쾰른성당의 대역사는 11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주교 라이날트 폰 다셀(Rainald von Dassel)은 이탈리아에서 동방박사 3인의 유골을 홈쳐 쾰른으로 온다. 이후 쾰른은 인기 있는 순례지가 되었는데 성물을 모실 보다 큰 성당이 필요했다. 1248년 기존의 성당을 부수고 그 위에 650년의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쾰른성당(Kölner Dom)


쾰른성당은 높이 157미터로 장엄하게 우뚝 서 있다. 중세시대 어떻게 저 높이로 짓겠다고 했는지 대단하다 싶다. 요즘같이 좋은 시멘트나 철구조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너지지 않고 돌로 저 높이를 쌓아 올렸으니 말이다.  650년 동안 대역사에 참여한 많은 이들의 열정이 느껴진다. 지금은 세 번째로 높은 교회건물이지만 188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쾰른 성당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성당과 교회, 박물관, 술집, 음식점, 카페,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마틴 구역(der Martinvoertel)이다. 10세기에 섬이었던 곳을 메워 만들었다. 중요 건물로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틴 성당(Groß St. Martin)이 있다. 그 옆으로 쾰른 대성당이 세워져 있다.


좁은 골목골목 거리 공연도 이루어지고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고대 로마 유적이 잘 전시된 로마-독일 박물관(das Roemisch-Germanische Musieum)과 현대미술 박물관(das Musiem Ludwig)이 있고 쾰른 교향악단이 있어 사람들이 눈과 귀를 행복하게 해 준다. 


쾰른은 한자동맹의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전하였다. 15세기 시민들이 지은 시민회관(der Gürzenich)과 시청사, 14세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한자동맹 건물(der Hansesaal)을 거닐면서 보면 잘 나가던 활기찬 도시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시청 앞에는 12세기 이래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유대인 집단 거주지역을 형성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독일에서 쾰른하면 카니발(der Kölner Karneval)이다. 카니발은 제5 계절이라 불린다. 11월 11일 11시 11분에 시작해 다음 해 사순절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까지 이어진다. 


카니발 첫날에 파티를 열고 난 후 조용히 지내다가 1월에 카니발 왕자(der Kanivalsprinz)를 정하고 집회와 무도회를 시작한다.  2월 중 카니발 전야제(Weiberfastnacht)가 우선 열리는데 여자들만 거리로 나와 시끄럽게 즐긴다. 그리고 다음날인 목요일부터 다음 주 화요일 저녁까지 모두 축제를 즐긴다. 춤추고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도시는 흥겨움에 시끄러워진다. 


특히 장미의 월요일(Rosenmontag)에는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장식차를 타고 거리를 돌며 사탕과 과자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월요일 행사는 182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카니발의 하이라이트이다.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에 종려 나뭇가지를 태워 몸이나 머리에 뿌림으로 끝이 난다. 재를 몸에 뿌려 자신의 죄를 사죄한다는 가톨릭 행사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다음 카니발까지 8개월을 기다린다. 


카니발이 독일인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한다는 공동체 정신의 발현이다. 살다 보면 독일인에게 공동체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국에서의 개인 중심의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은 독일의 공동체 의식이 생소할 수 있으며 실수를 할 때가 많다. 여행 목적으로 독일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독일인이 모여 즐기는 것을 같이 즐길 수 있으면 충분하다.
 
쾰른에는 난쟁이 하인첼(die Heinzelmännchen) 이야기가 유명하다. 1836년 발간된 코피쉬(August Kopischs) 이야기에 따르면 쾰른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편한 것만 찾는 등 게을렀다. 하지만 밤마다 찾아와서 대신 일해주는 난쟁이 때문에 인생을 즐길 수 있었다. 빵집에서는 빵을 대신 만들고 목수 집에서는 톱질을 대신하고 정육점에서는 고기를 써는 등 쾰른 사람들의 일을 대신해 주었다. 


어느 날 호기심 많은 제단사의 부인이 난쟁이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바닥에 콩을 뿌렸다. 밤이 되자 난쟁이들이 평상시처럼 일하러 방문하였다. 그들은 문을 열고 걷다가 콩을 밟고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 소리에 깬 재단사 부인은 난쟁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난쟁이의 얼굴을 봐서는 안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난쟁이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 후로 쾰른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야만 했다고 한다. 쾰른 성당 근처에 난쟁이를 기념하는 분수대가 있다..
 
쾰른 사람들은 쾰쉬(Kölsch)라는 맥주를 주로 마신다.  저녁시간 바쁠 때 맥주집에 가면 주문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늦는다고 웨이터들을 한국식으로 몰아세우면 안 된다. 웨이터들에게 맥주를 시키면 종이로 된 잔 받침대를 테이블에 던지듯이 놓는다. 처음에는 왜 이러나 당황스러웠는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한다. 맥주를 더 시키지 않는 경우 종이 받침대를 맥주잔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하인첼(die Heinzelmännchen)분수대


쾰른은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아데나워(Konrad Adenauer,1876 - 1967) 수상의 고향이다. 그는 30세의 나이에 쾰른 시장이 되었지만 나치 치하에서 비밀경찰에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전쟁 후 현 집권여당인 기독민주당 (CDU)을 창당하고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수상으로 독일을 이끌었다. 독일의 경제를 다시 부흥시켰으며 주변국과 관계를 개선하여 독일을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안착시켰다.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아데나워재단 장학금을 받고 독일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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