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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Jan 11. 2019

중세도시 로텐부르크

로텐부르크(Rothenburg ob der Tauber)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 속한 도시로 인구만 명이 갓 넘는 소도시이다. 타우버 강 상류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만틱 가도에 위치한 로텐부르크는 중세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11세기 초 이 지역을 다스리던 로텐베르크 백작(Die Grafen von Comburg-Rothenburg) 가문의 이름이 도시명이 되었다. 지중해가 경제의 중심이었던 시절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동 통로였던 로만틱 가도에 가까이 위치한 로텐부르크에 정착하게 되었다. 


1108년 로텐베르크 가문의 대가 끊기자 도시는 슈타우퍼(Staufer)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붉은 수염 바르바로사(Barbarossa)라는 별명을 가진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가 로텐베르크에서 자랐다.

로텐부르크(Rothenburg ob der Tauber)


그는 가문 최초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인물이다. 12세기 후반 그는 도시 방어를 위해 1.5 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쌓는다. 군사적으로 로텐베르크는 타우버 강가에서 60미터의 높이의 계곡 위에 위치해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화살과 창칼, 투석기가 무기로 사용되던 시기에 천연의 요새였다.


여러 차례 전쟁에서 살아남은 프리드리히 1세는 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가 열 두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속에 잠들어 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 내려와 구원한다는 둥, 까마귀가 날지 않는 날이 오면 왕이 잠에서 깨어나 일어날 거라는 둥, 산속을 혼자 돌아다니는 어린이는 왕이 까마귀를 살피기 위해 보낸 시종이라는 둥 그는 독일인 사이에 전설이 되었다.


1274년 로텐베르크는 제국 자유도시의 지위를 부여받고 상업도시로 발전한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2.4킬로미터의 2차 성벽을 쌓게 된다. 처음 지어진 성벽 서쪽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길이 되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마르크스 성문(Markusturm), 바이서 성문(Weisserturm), 유대인 거리가 여기에 속한다. 도시에는 이 두 성문을 포함 총 8곳의 성문이 있다. 

마르크스 성문(Markusturm)


도시 북쪽의 유대인 거리(Judengasse)는 중세시대 유대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로텐부르크는 공공 생활, 법, 사회, 종교적으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한다. 그중 한 사건이 유대인 추방이었다. 1521년까지  유대인은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350년이 지난 1870년 유대인이 다시 살기 시작하였는데 나치의 탄압으로 또다시 유대인은 도시에서 사라졌다. 독일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불행한 역사를 기념하는 기념관들이 옛 유대인 거주지에 있는 걸 볼 수 있다.


2차 성벽 공사 때 만들어진 북쪽 성문(Klingentor)의 성벽에는 후기 고딕 양식의 성당이 붙어 있다. 성 볼프강(St. Wolfgan) 성당이다. 붙어있는 성당의 북쪽 벽에는 화살 발사 구멍이 있다. 중세시대 한정된 도시재정으로 성당 기능과 방어 기능을 동시에 해결하고자 고안한 고육지책이다. 북쪽 성문 내에는 또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재정을 아껴 쓰고자 했던 중세 시민사회의 노력이 느껴진다.


1356년 대지진이 발생하여 성벽이 무너졌다. 이후 3차 성벽공사가 시작되었다. 3.4 킬로미터 길이로 지어졌다. 이때 슈피탈(Spital)이라는 중세 복합의료시설이 성벽 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슈피탈은 중세시대 병원, 양로원, 빈민 구호소, 여관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총 11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슈피탈 안쪽에는 십일조 납세 장소(Zehntscheune)가 있다. 십일조는 교회와 슈피탈의 운영경비로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도시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에는 중세시대 큰 도매시장이 열렸다. 중세도시는 동업조합의 힘이 강해서 중요한 물건을 꼭 지정장소에서 팔게 하였다. 가격혼란, 균일한 품질유지, 신용 유지를 위한 자발적 시장경제질서가 잡혀 있었다. 

시청사


광장에는 16세기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사가 있다. 정면의 입구 부분은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증축되었다. 입구 위쪽에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왼손에는 저울과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데 도시의 공공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의지가 느껴진다. 시청 건물 내부에 있는 220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높이 52미터의 종탑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보면 시내와 성 주변의 자연환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청사 옆 광장 북쪽에 시의원 연회장(Ratstrinkstube)이 있다. 건물 정면 지붕 아랫부분에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3개의 시계가 보인다. 맨 위가 해시계, 날짜 시계, 마지막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있다. 맨 아래 시계 양 옆에는 커다란 창 두 개가 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매시간마다 창이 열리면서 인형극이 펼쳐진다.. 왼쪽 창에는 가톨릭 연맹의 틸리(General Tilly) 장군의 인형, 오른쪽 창에는 누슈(Nusch) 전(前) 시장의 인형이 나타나 30년 전쟁 때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시의원 연회장(Ratstrinkstube)


전쟁 당시 로텐부르크는 신교 도시였다. 당시 로텐베르크를 점령한 틸리 장군은 포도주 한통을 단숨에 마시지 않으면 시민을 죽이고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누슈 전시장은 3.25리터나 되는 와인을 단숨에 마셔 도시를 구했다. 3.25 리터면 시중에 파는 포도주 한 병이 0.75 리터이니 어림잡아 계산해도 대단한 주량이다. 그래서 시장 인형의 별칭이 <원 샷(한 잔) 선생(Meistertrunk)>이다. 1631년 10월 30일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 날을 기려 매년 축제(Meistertrunk Festspiel)가 열린다.

축제(Meistertrunk Festspiel)


광장에는 성 게오르그 분수대(Ritters St. Georg)도 보인다. 미국 올랜드에 있는 디즈니 월드 독일관에 있는 분수대의 원조이다.


마르크트 광장과 연결된 헤른 거리(Herrngasse)에는 관리들과 대상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부자동네에서 그런지 길이 넓다.


시청사 뒤쪽으로 고딕 양식의 성 야콥 교회(St. Jakobskirsche)가 있다. 가톨릭 성당으로 지었으나 신교 교회로 바뀌었다. 교회 내에는 틸만 리멘슈나이더 (Tilman Riemenschneider)가 만든 제단(Heiligblut-Retabel)이 있다. 제단에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나무로 조각한 작품이 걸려있다. 

 

리멘슈나이더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돌과 나무로 만든 훌륭한 조각 작품을 남긴 예술가이다. 1520년부터 1521년까지 뷔르츠부르크 시장이었던 시절 농민전쟁에 가담한 죄로 양손을 잃고 작품 활동을 멈추었다.


로텐베르크의 건물들은 바로크 양식에서 멈춰 있다. 이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 중에 30년 전쟁(1618-1648)의 영향으로 몰락한 도시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30년 전쟁은 독일 영토에서 벌어진 신교와 구교 간의 최대이자 최후의 종교전쟁이다. 이 전쟁이 독일인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1617년 가톨릭교도인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는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취소해 버린다. 1618년 보헤미아의 신교도 귀족은 그를 왕의 자리에서 내쫓고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세우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스페인이 가세한 가톨릭 동맹에 패하고 만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시작이다. 30년 전쟁은 종교적 이유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결합되면서 유럽 열강의 패권전쟁으로 변질 장기화되었다.  


1625년 독일 영토에 관심이 많던 신교도인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재정지원을 받아 1625년 독일을 침입하였다. 발렌슈타인(Wallenstein) 장군과 틸리(Tili) 장군의 선전으로 가톨릭 동맹이 덴마크에  승리한다. 


1630년 이번에는 신교도인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가 프랑스의 후원을 얻어 독일을 침입하였다. 스웨덴군은 황제 군을 격파하고 틸리 장군은 전사한다. 그러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도 전사했다. 스웨덴 왕의 죽음으로 자신감이 생긴 황제는 1634년 그간 부담스러웠던 발렌슈타인을 암살해버린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1634년 가톨릭 동맹군이 스웨덴-신교도 제후 연합군에 승리를 거둔다. 1635년 가톨릭 동맹군과 신교도 군은 가톨릭에 유리한 프라하 평화협정을 맺는다.


1535년 이번에는 신교도 세력을 지원하던 프랑스 루이 13세가 스웨덴과 연합하여 독일을 침입하고 에스파냐에도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전쟁의 양상은 프랑스와 스웨덴 연합군의 승리로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지고 30년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독일 국민들이었다.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경제활동은 위축되었다. 질병이 난무했고 군대와 폭도에 의한 약탈, 강간, 방화, 살인이 그치지 않았다. 많은 거지와 부랑자가 생기고 남편의 전사로 먹고살 길이 없던 여자들은 창녀나 집시가 되기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독일인 800만 명이 죽고 지금의 체코지역인 보헤미아는 전쟁 전 200만이었던 인구가 전쟁 후 70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전쟁 후 독일 내에는 가톨릭과 신교인 루터파 칼뱅파가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은 유명무실 해졌으며 스페인이 몰락하고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잘 나가던 신성로마제국 자유도시 로텐부르크도 함께 몰락하고 다시는 옛 명성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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