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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Jan 11. 2019

동화나라 퓌센

퓌센(Füssen)은 독일 남부 끝자락 바이에른 주에 속한 도시로 인구가 2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이다. 5킬로미터 북쪽으로 가면 오스트리아이다. 고대 로마시대 이탈리아 북부와 아우크스부르크를 연결하는 도로가 생기면서 도시가 생겨났다. 로만틱 가도가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자그마한 도시는 항상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바로 루드비히 2세(Ludwig II)가 세운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 때문이다. 디즈니 영화 시작할 때 보이는 로고와 디즈니랜드 성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는 산을 올라가기 전 반대편에 노란색의 성이 보인다. 루드비히 2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가 지은 호엔슈반가우 성(Schloss Hohenschwangau)이다.  성 근처에는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버지 루트비히 1세는 수도 뮌헨을 그리스 아테네처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독일적인 방식 즉 중세시대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은 시민사회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왕의 권위가 신에게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힘을 잃어갔다.  왕조지배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지배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유럽의 왕들은 왕가의 기원과 족보를 연구하고 역사적인 요새들을 고치거나 새로 지었다.    

호엔슈반가우 성(Schloss Hohenschwangau)


성안은 입장권을 사고 들어가며 가이드가 설명도 해준다. 내가 속한 그룹을 안내한 가이드는 굉장히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조심스러운 독일 사람들을 주로 보다가 다른 모습에 의아했는데 나중에 바이에른 주 사람들의 자부심은 독일 내에서도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이에른 주는 독일에서 가장 잘살고 바이에른 뮌헨 축구팀은 우승을 못하는 연도를 알아보는 게 빠를 정도로 명문구단이다. 독일에서 축구는 실생활에서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성안을 볼 수 있는 입장권은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많은 관광객이 몰려 입장권을 사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예약 없이 와서 당일 예매를 하면 입장권을 살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당일 예매를 하는 운 좋은 날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2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1864년 루드비히 2세는 18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처음에는 열심히 일을 하였다. 용모도 수려하고 똑똑한 두뇌의 소유자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루드비히 2세(Ludwig II) 초상화


그러나 이상 징후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21살이 되던 해 결혼 준비과정에서 약혼녀와의 결혼식을 연기하고 파혼한다. 그 후 그는 독신으로 살아간다.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동성애자가 되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이에 대한 죄의식으로 항상 괴로워했다.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괴롭힌다. 바로 독일의 통일이다. 1871년 비스마르크의 주도 아래 부국강병에 성공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격파하고 독일을 통일한다. 당시 독일은 23개의 크고 작은 국가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나 루드비히 2세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로이센이 군사적으로 강해졌지만 바이에른은 전통적인 강국으로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힘의 논리가 우선인 당시 유럽 사회에서 달리 방법은 없었다. 독일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후 루드비히 2세는 크게 좌절한다. 감수성이 강한 그는 성적 문제와 정치적 무력감에 휩싸여 뮌헨에서 나와 알프스 근처에 머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탈출구로서 노이슈반슈타인 성 건설에 열정을 보이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서서히 미쳐 갔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는 낭만주의가 유행한다. 민족 고유의 역사와 전통에서 많은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상으로 문화예술분야에서 두드러졌다. 당시 영국 프랑스에 비해 뒤쳐졌던 독일인들에게 낭만주의는 크게 사랑받게 되었다. 문학 연극 회화 음악 건축분야에서 낭만주의 작품들이 쏟아졌다. 대표적 인물이 음악가 바그너(Richard Wagner)이다.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의 음악의 마니아였다.  16세 때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 음악에 푹 빠진다.  루트비히 2세는 <로엔그린> 대본을 암기할 정도였다.  

 

왕이 된 후 처음 한 일은 바그너를 초청한 것이다. 당시 바그너는 작품 활동과 낭비벽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왕은 바그너의 빚을 해결해 주었고 작품 활동에 대한 재정지원을 하였다.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첫 공연이 이루어진다.

 

바그너가 정치에 개입하자 루트비히 측근과 국민들의 반대가 일었다.  이에 바그너는 1865년 바이에른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어려움에서 구해준 의리 때문인지 미치광이 왕 루드비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


성 건축은 1869년 시작되었다. 중세의 성을 상상하여 신 고딕 양식으로 계획되었고 비잔틴, 로마네스크 양식을 접목하여 중세의 성을 재해석하였다. 성의 외관은 흰색 석회암,  입구와 돌출된 창은 사암,  일반 창과 기둥 그리고 아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일부 철구조물이 도입되었다. 바위산 정상에 성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건축담당자와 인부들은 왕의 무리한 요구에 하루 종일 일해야 할 때도 있었다.  


외관과 달리 내부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추었다. 중앙난방, 수도, 수세식 화장실, 전화기까지 있다. 곳곳에 바그너의 작품인 탄호이저(Tannhäuser), 로엔그린(Lohengrin), 파르지팔(Parsifal) 등을 묘사한 조각과 벽화로 꾸며져 있다. 방들은 크고 웅장하며 마치 전시장처럼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과함이 넘쳐 어색한 느낌이다.  


그는 추가로 린더호프 성(Schloss Linderhof)과 헤렌히임제 성(Herrenchiemsee)을 짓기 시작했다. 이런 무리한 공사 진행은 바이에른의 재정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왕은 네 번째 성을 계획한다. 프론텐(Pfronten) 지역의 팔켄슈타인 바위산 정상에 성(Schloss Falkenstein)을 짓고자 하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신하였던 바이에른 수상은 왕의 숙부와 상의하여 그를 스타른베르거 호수(Starnberger See)의 베르그 성(Schloss Berg)에 감금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왕은 호수를 산책하던 중 주치의와 익사한 변시체로 발견되었다. 암살인지 자살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루트비히 2세는 해마다 150만 마르크를 궁성 건축에 사용하였다.  1875년 되자 자신의 재산까지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빚을 진다.   1886년 그가 죽었을 때 빚이 1430만 마르크였다.  바이에른은 이 빚을 1899년까지 갚아야 했다.


루트비히 2세는 성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후 내부공사가 조금 더 진행되었으나 현재까지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미치광이에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인해 영원히 살게 되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기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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