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프(Calw)는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도시다. 인구는 15만으로 독일에서는 작지 않은 규모다. 1075년 세워졌으니 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30분가량 좁은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고 내리다 보면 나골드(Nagold)강이 보인다. 하천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 크기의 강이 옛 시가지를 끼고 흐르고 있다. 강을 따라가다 보면 검은 숲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석회암층과 연결된 지층이 남부 독일과 스위스 부근까지 이어져 색다른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한국의 산등성이 굽이굽이 이어진 좁은 지방도로를 따라 운전하는 기분이 든다.
이 지역은 원래 홍수가 잦아 농사짓기가 어려운 땅이다. 그래서 중세시대 이곳 사람들은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강을 이용한 수상교통의 이점을 살려 유리, 목재, 소금 무역을 하였다. 인구가 늘면서 11세기 말 수도원이 자리 잡았고 많은 학자 사상가 예술가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신교도적 윤리에 기초한 노동 가치관이 일찍 성립하였다. 이후 섬유산업과 유통을 기반으로 도시가 빠르게 발전하였다. 17세기 전성기를 이루는데 이를 증명하는 200 채 이상의 전통가옥이 있다. 전통가옥은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데 걷다 보면 잠시 동화적 환상에 빠진다.
그러나 정작 이 도시가 유명한 것은 헤르만 헤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칼프시 로고에 아예 <헤르만 헤세의 도시 칼프(Die Hermann-Hesse-Stadt)>라고 쓰여 있다.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작품은 60개 언어로 번역되어 1억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시내에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이 있다. 헤세 동상이 다리에 서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고 크눌프 등 작품 속 인물들이 시내 곳곳에 설치미술처럼 세워져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는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이고 어머니는 칼프 지역 유지였던 목사 집안 출신이었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고 했던가. 헤세의 어머니 마리(1842-1902)는 활동적인 신여성이었다.
일찍이 인도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함께 선교사 활동을 하였다. 독일로 돌아온 이후 뷔템베르크 주 최초 공립고등학교 여자 선생이 되었다. 당시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1871년 칼프 실업학교 영어선생이 되었다. 지금 보면 여성인권이 발달한 유럽에서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다. 한국에서 지낼 때 서구 유럽은 남녀가 완전히 평등하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와서 보니 독일도 일정 정도 남녀차별이 존재한다. 독일은 지금도 여성과 남성의 임금격차가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좀 더 있는 편이다.
그녀는 이후 재혼하여 헤세를 낳는다. 이후에도 선교잡지에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고 지역 출판 연합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하였다.
활동적인 어머니와 다르게 헤세는 내성적 성격의 감수성이 많은 사람이다. 명성을 쫓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정원 가꾸는 일을 좋아했다. 사회생활보다는 내면세계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헤세는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자퇴한 후 고향에서 직공 생활을 잠시 하다가 18세 되던 1895년 튀빙겐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작가로서의 꿈을 키운다. 1903년에 칼프에 잠시 머물며 1904년까지 <수레바퀴 밑> 일부분을 쓰기도 하였지만 이후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스위스에서 보낸다.
하지만 헤세는 고향을 절대 잊지 않았고 고향에 대해 늘 이야기하였다. 소년 시절 뛰놀던 골목, 교회, 성당, 다리, 나골드 강, 숲에서 보냈던 추억을 항상 기억하고 떠올렸다. 그는 어린 시절 추억과 경험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작품의 토대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작품 곳곳에서 인간은 고향에서의 경험을 살아가는 내내 간직하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더라도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되새긴다고 묘사하고 있다. 나도 어릴 적 살던 곳을 방문하거나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그때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가 있다. 그러면 왠지 함께 하는 음식과 술이 달게 느껴진다.
헤세는 작품 속에서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항상 무엇인가 갈망하면서도 그 대상이 무엇인지 정작 모르는 상태. 갈망하던 것이 본인 앞을 지나쳐가는데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모습. 바로 헤세의 유년시절이었고 이것이 오롯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이런 모습을 멀리 있는 한국의 젊은 감성들이 열광했었다.
칼프 시내를 걷으면 독일 전통 목조 건물을 많이 볼 수 있다. 언덕을 따라 걸어가면 광장(Marktplatz), 레더 거리(Lederstraße), 알트부르거 거리(Altburger Straße)를 중심으로 전통가옥들이 서 있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 비해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독일 전통가옥은 중세부터 내려져오는 주택양식이다. 독일어로 <파흐베어크 하우스(Fachwerkhaus)>라고 하는데 나무로 칸이 구획된 집이란 뜻이다. 상자를 쌓아 올린 것처럼 지어졌다. 1층보다 2층이 큰 경우도 보인다.
전통가옥 건축은 우선 돌이나 벽돌로 기초공사를 한다. 그 위에 나무로 구조를 세우고 목재를 정교하게 이어 맞추고 나무못으로 고정한다. 그리고 흙을 발라 벽을 만들고 기와를 얹어 완성한다. 아래층 천장으로 되어있는 목재와 위층의 바닥으로 되어 있는 목재의 배열은 서로 직각으로 되어있다.
전통가옥은 지역별로 특유의 스타일이 있고 법으로 이를 보존하고 있다. 북부 독일 전통가옥은 네덜란드와 영국과 비슷하고 남동부 독일 바이에른과 스위스의 전통가옥은 나무 장식이 두드러지고 목재 골격이 노출되었다. 그에 비해 독일 남서부 지역은 다소 단순하고 투박한 느낌을 준다.
독일에는 전통가옥만 보러 돌아다니는 여행코스가 있다. 독일 전통가옥 여행길(Deutsche Fachwerkstraße)이라고 하는데 2,000 킬로미터 정도의 여정이다. 독일 북부의 니더작센(Nieder Sachsen), 작센-안할트(Sachsen-Anhalt) 헤센(Hessen), 튀링겐(Thueringen), 바이에른(Bayern),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uerttenburg) 주를 돌아다니는 코스다.
칼프는 남서부 독일 코스의 중심지이다. 30개 도시의 지방도로를 따라 네카어 강가의 모스바흐(Mosbach), 검은 숲의 자즈바흐발덴(Sasbachwalden), 보덴 호수가 메어스부르크(Meersburg am Bodensee)까지 1082 킬로미터 여정을 자동차나 자전거로 돌아다니는 코스이다. 저전거로 여행하면 하루 40에서 90 킬로미터를 달리는데 약 17일 정도 걸린다. 독일에서는 70대 노인부부가 자전거 타고 장기간 여행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히어자우 수도원(Kloster Hirsau) 폐허도 가볼만하다. 칼프 시내에서 차로 5분 정도 가면 히어자우라는 마을이 보인다. 이곳에 1082년에 세워진 바실리카 양식의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이 있었다. 16세기 말 팔츠 주교 계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전쟁 후 잔해는 시민들의 집을 짓는 벽돌로 쓰여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