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은 독일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에 살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한다. 도시는 넘치는 낭만과 유혹을 머금고 있다. <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랑에 빠졌어요(Ich hab' mein Herz in Heidelberg verloren)>라는 노래 가사처럼. 소설 <황태자의 첫사랑(Alt Heidelberg)>에서 작센 왕국 황태자 칼 하인리히가 하숙집 아가씨 케티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과 슬픈 이별을 경험했듯이. 65세 괴테(Goethe)와 30세 유부녀 마리아네 폰 빌레머 부인의 사랑처럼.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인만의 도시가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의 많은 도시를 폭격하였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는 폭격을 피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했던 한 미군 사령관이 사랑스러운 이 도시룰 폭격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문화와 역사가 흐르는 구시가지
하이델베르크에는 1196년 네카(Neckar) 강기슭에 세워졌다. 80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은 아름다운 숲과 고성, 이야기를 만들었다. 네카강에는 카를 테오도르 다리(Die Karl Theodor Brücke)가 있다. 이 다리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고급 주택가와 철학자의 길((Der Philosophenweg)로 유명한 하일리겐베르그 산(Der Heiligenburg) 이 있고 남쪽에는 고성, 교회, 시청, 광장이 있는 하이델베르크 구시가가 있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는 유럽에서 가장 긴 보행자 거리이다. 고풍스러운 상점, 식당, 카페, 교회, 호텔, 관공서를 보면서 걸어 보라. 중세 시대를 걷는 듯한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나 맥주를 한잔해 보라. 따뜻한 햇살이 편안함을 주고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모두가 여유롭고 모든 것이 평화롭다. 이 여유를 영원히 갖고 갈 수는 없지만. 일상생활에 곧 사라지겠지만. 그래서 슬프지만. 오늘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하이델베르크성(Das Heidelberger Schloss)은 산비탈에 있다.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다. 지금 당장 기사들이 말을 타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지역을 다스리던 제후가 살던 성으로 수세기에 걸쳐 지어졌다. 제후 각각의 기호와 스타일이 반영되었고 독일식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조화를 보여준다.
17세기에 일어난 30년 전쟁은 성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 후 도시 재건에 성의 돌들이 쓰였고 폐허가 된 성터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는 곳으로 변했다. 그렇게 잊히고 철저히 방치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독일 낭만주의의 출현으로 성은 재조명되고 성과 성 주변이 보존 정리되었다. 성안에는 제약 박물관과 20만 리터를 한 번에 저장할 수 있는 와인 통도 있어 눈길을 끈다.
성안 광장에서는 일 년에 세 번(5월, 8월, 9월 마지막 주말) 불꽃놀이가 행해진다. 불꽃놀이는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성을 추억하기 위해서다. 콘서트, 연극, 뮤지컬, 공연과 함께 이루어진다.
밤이 되면 가 볼만한 곳이 있다. 구시가지 구석 좁은 골목에 있는 케이브 54 (Das Cave 54)이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학생 재즈클럽이다. 입장료를 내고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동굴 같은 곳에 바와 작은 무대가 있다. 이곳은 학생들에 의해 1954년 대학생 사교 연합모임으로 세워진 클럽이다. 와인을 마시며 토론하고 재즈 잼 세션도 하던 곳이다. 루이 암스트롱과 엘라 피츠제럴드 등 재즈의 전설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요즘은 재즈 외에도 블루스, 록, 디스코, 테크노, 독일 가요 등 다양하게 공연되고 있다.
하일리겐베르그 산(Der Heiligenberg)
시가지 북쪽 네카강 건너편에 하일리겐베르그산이 있다. 산비탈에 고급주택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부자들은 공통적으로 다소 높고 조금은 인적이 드문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다.
좁은 산길을 따라 사람들이 걷고 있다. 철학자의 길이다. 오래전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과 학생들은 열정이 넘쳤나 보다. 학기 시작 전에 학생들이 이곳의 아름다음에서 철학적 영감을 얻고자 산길을 찾았다. 그리고 철학자의 길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괴테, 아이센도프(Eichendorff), 마크 트웨인(Mark Twain), 횔덜린(Hoelderlin), 헤겔(Hegel), 야스퍼스(Jaspers) 등 유명 작가와 철학자들도 이 길을 찾아 걸었다.
하일리겐베르그산은 7000년 전에 도기와 돌도끼를 사용하던 신석기인이 살던 곳이다. 기원전 480년부터는 켈트족이 이곳에 터를 잡고 번성하였다. 로마시대에는 주피터 신과 머큐리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로마시대가 무너지면서 AD 300년 이후에는 도적이 우굴거리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가 882년 프랑크 왕 루드비히 3세(Ludwig III)가 이 지역을 베네딕트 수도회에 기증하였다. 수도회는 성 미하엘을 기리는 수도원(Das Michelskloster)을 세웠다. 그리고 1094년 옆에 추가로 스테판 수도원(Das Stephanskloster)을 세웠다. 이후 500년간 수도사들이 거처하며 번성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은 버려졌고 폐허가 되었다. 산 이름이 하일리겐베르그(Der Heiligenberg)인 이유가 이곳에서 성인(alle Heiligen)들을 기렸기 때문이다.
숨이 찰 때쯤 팅슈태테(Thingstätte)가 보였다. 나치 시절(1934/1935년) 나치 종사자들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생들이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을 본떠서 만든 노천극장이다. 좌석 8천 입석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완공했을 때 나치 선전부장 괴벨스가 축하하러 왔었다. 선전선동을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됐었는데 지금은 시민들에 의해 노천극장으로 쓰이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시민들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모던한 시내가 나온다.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차, 전차,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출퇴근 시간이면 중앙역 자전거 주차장 주변은 분주해진다. 구시가지를 즐기다 가는 관광객 눈에는 편안하고 아름답고 걱정 없는 도시로 보이지만 시내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네카 강변에서는 사람들과 반려동물들이 즐겁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진다. -산책. 조깅, 조정 등 스포츠, 독서, 대화, 선탠-등.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즐겁게 노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혼한 가정의 부모와 얘들이 한 달에 한번 만나 즐기는 경우도 있다 하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Die 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
하이델베르크는 대학도시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도시의 앙꼬같은 존재다. 학생 33.000명과 교직원 10.000명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다니고 있다. 참고로 하이델베르크 인구는 15만 명이다.
1386년 팔츠(Pfaltz)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 (Ruprecht I.)는 도시에 독일 최초의 대학를 세웠다. 그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대학은 독일뿐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독일에서는 대학 졸업생은 아카데미커(Der Akademiker)라고 부르며 인정을 한다. 독일 대학생은 한국과 달리 입학했다고 졸업이 보장되지 않는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탈락하며 어렵게 졸업을 한다. 한국은 입학이 어렵고 졸업이 쉬운 반면 독일은 입학은 다소 쉽지만 졸업이 어렵다.
대학은 역사를 주도했고 중심에 있었다. 1848년 3월 혁명 이전에 교수들은 자유주의를 선도하였고 학생들은 헌법에 의한 질서와 통일 민족국가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키고자 행동하였다. 학생들은 학생회를 조직하고 혁명을 이끌었다.
학생들 간 정치적 논쟁은 활발했다. 종종 칼을 사용하는 결투로 이어졌다. 결투로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적포도주를 얼굴에 붓고 훈장처럼 보여주며 다녔다. 그러나 결투는 불법이었다. 불법을 한 학생은 대학생 감옥으로 보내졌다. 학생 감옥은 1545년에 세워졌다. 감옥은 습하고 추웠으나 학생들은 강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손님 방문이 가능했고 음식도 배달해 먹을 수 있었다. 학생들은 벽에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했다. 음주도 허용되었다. 술에 취해 밤에 고성방가를 했다는데 주민과 경찰을 힘들었다고 한다. 감옥은 1914년 폐쇄되었다. 현재는 일반인에게 개방된 볼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