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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Jan 03. 2019

낭만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를 독일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라며 자랑스러워한다. 하이델베르크는 낭만적이고 유혹적이다.  <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랑에 빠졌어요(Ich hab' mein Herz in Heidelberg verloren)>라는 노래 가사처럼.  소설 <황태자의 첫사랑(Alt Heidelberg)>에서 작센 왕국 황태자 칼 하인리히가 하숙집 아가씨 케티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과 슬픈 이별을 경험했듯이.  65세 괴테(Goethe)와 30세 유부녀 마리아네 폰 빌레머 부인의 사랑처럼.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하지만 곳곳에 전쟁의 상흔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폭격에 독일의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하이델베르크는 폭격을 피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했던 한 미군 사령관이 자신이 사랑한 도시에 대한 폭격을 막았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는 네카어(Neckar) 강기슭에 1196년 세워졌다.  걷다 보면 820년의 시간 속에 아름다운 숲과 고성, 도시 곳곳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  도시를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네카어강에서 카를 테오도르 다리(Die Karl Theodor Brücke)는 단연 눈에 띈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고급 주택가와 철학자의 길((Der Philosophenweg)이 유명한 하일리겐베르그산(Der Heiligenburg) 이 있고 다른 쪽에는 고성, 교회, 시청, 광장이 있는 하이델베르크 구시가가 있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는 유럽에서 가장 긴 보행자 거리이다. 상점, 식당, 카페, 교회, 오래된 호텔, 관공서 건물과 사람들을 보면서 걷다 보면 즐겁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나 맥주 한잔하며 따뜻한 햇살을 즐기면 이러는 나 자신이 부럽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여유롭다.  그러나 이 여유가 닥쳐올 일상생활에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 잠시 즐거운 슬픔을 느낀다.  

광장 너머 하이델베르크성

 

9월29/30일 가을축제

녹음이 완연한 산비탈에 서 있는 하이델베르크성(Das Heidelberger Schloss)은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다. 금방이라도 기사들이 창을 든 채 말을 타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13세기 이후 지역을 다스리던 제후가 살던 성으로 수세기에 걸쳐 지어졌다. 제후 각각의 기호와 스타일이 반영되었고 독일적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조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17세기에 일어난 30년 전쟁으로 성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 후 도시 재건에 성의 돌들이 쓰였고 폐허가 된 성터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는 곳으로 변했다. 그렇게 잊히고 철저히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독일 낭만주의의 출현으로 재조명되고 성과 성 주변이 보존 정리되었다. 성안에는 제약 박물관과 20만 리터를 한 번에 저장할 수 있는 와인 통도 있어 눈길을 끈다. 

 

성안 광장에서는 일 년에 세 번- 5월, 8월, 9월 마지막 주말에 성 불꽃놀이가 행해진다. 불꽃놀이는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성을 추억하기 위해서란다.  콘서트, 연극, 뮤지컬, 공연과 함께 이루어지는 한여름 밤의 불꽃놀이는 볼만하다. 

 

밤이 되면 가 볼만한 곳이 있다.  구시가지 뒤쪽의 좁은 골목에 있는 케이브 54 (Das Cave 54)라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학생 재즈클럽이다.  입장료를 내고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동굴 같은 곳에 바와 작은 무대가 있다.  이곳은 학생들에 의해 1954년 대학생 사교 연합모임으로 세워진 클럽이다.  이곳에서 와인을 마시며 토론하고 재즈 잼 세션을 하였다. 루이 암스트롱과 엘라 피츠제럴드 등 재즈의 전설들이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요즘은 재즈 외에도 블루스, 록, 디스코, 테크노, 독일 가요 등 다양하게 공연되고 있다. 화요일은 저녁 8시 반부터 새벽 2시까지 목요일부터 토요일에는 저녁 9시부터 새벽 4시까지만 열린다. 

케이브 54

 

하이델베르크성에서 강 건너편을 보면 하일리겐베르그산(Der Heiligenberg)이 보인다. 산비탈에 고급주택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다리를 건너면 많은 사람들이 좁은 산길을 따라 걷는 모습이 보인다.  이 길이 철학자의 길이다.  학기 시작 전에 철학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찬 철학과 학생들이 이 곳의 아름다음에서 영감을 얻고자 하는 조급함에 철학자의 길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괴테, 아이센도프(Eichendorff), 마크 트웨인(Mark Twain), 횔덜린(Hoelderlin), 헤겔(Hegel), 야스퍼스(Jaspers)같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즐겨 걷던 길로 알려져 있다. 

하일리겐베르그산 스테판 수도원에서 바라보는 하이델베르그 구시가지

 

하일리겐베르그산은 구시가보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곳이다. 7000년 전에 도기와 돌도끼를 사용하던 신석기인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480년부터는 켈트족이 이곳에 터를 잡고 번성하였다. 로마시대에는 주피터 신과 머큐리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로마시대가 저물어가면서 300년 이후에는 도적이 우굴거리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가 882년 프랑크 왕 루드비히 3세(Ludwig III)가 이 지역을 베네딕트 수도회에 기증하였다. 수도회는 성 미하엘을 기리는 수도원(Das Michelskloster)을 세웠다. 그리고 1094년 옆에 추가로 스테판 수도원(Das Stephanskloster)을 세웠다. 이후 500년간 수도사들이 거처하며 번성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은 버려졌고 폐허가 되었다. 산 이름이 하일리겐베르그(Der Heiligenberg)인 이유가 이곳에서 성인(alle Heiligen)들을 기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테판 수도원

 

숨이 찰 때쯤 팅슈태테(Thingstätte)가 보인다.  나치 시절(1934/1935년) 나치 종사자들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생에 의해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을 본떠서 만든 노천극장이다. 좌석 8천 입석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완공했을 때 나치 선전부장 괴벨스가 축하하러 왔었다. 선전선동을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됐었는데 지금은 시민들에 의해 노천극장으로 쓰이고 있다. 

팅슈태테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모던한 시내가 나온다.  관광보다는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차, 전차,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출퇴근 시간이면 중앙역 자전거 주차장 주변은 분주해진다.  구시가지 관광지의 좋은 것만 보고 즐기다 가는 관광객 눈에는 편안하고 아름답고 걱정 없는 도시로 보이지만 이곳도 관광지역만 벗어나면 나름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하이델베르크 젖줄인 네카어 강변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반려동물들이 즐겁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양한 활동-산책. 조깅, 조정 등 스포츠, 독서, 대화, 선탠-을 즐기는 모습이 아름답다.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즐겁게 노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혼한 가정의 부모와 얘들이 한 달에 한번 만나 즐기는 경우도 있다 하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Die 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이 없는 하이델베르크는 앙꼬 없는 찐빵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386년 팔츠(Pfaltz)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 (Ruprecht I.)에 의해 세워진 독일 최초의 대학이다.  그는 비록 글을 읽을 줄 몰랐으나 그가 세운 대학은 독일 최고의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대학 졸업생은 아카데미커(Der Akademiker)라고 따로 부르며 인정을 해준다.  독일 대학생은 한국과 달리 입학했다고 졸업이 보장되지 않는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탈락하며 어렵게 졸업을 한다.  한국은 입학이 어렵고 졸업이 쉬운 반면 독일은 입학은 쉬운 대신 졸업이 어렵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명성에 걸맞게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1848년 3월 혁명 이전에 교수들은 자유주의를 선도하였고 학생들은 헌법에 의한 질서와 통일 민족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진보적인 학생들은 학생회를 조직하고 혁명을 이끌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대학생 연대를 진보적인 것으로 여겼으나 오늘날에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면 진보층에서 비판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도서관

 

학생들 간의 정치적 논쟁은 종종 칼을 사용하는 결투로 이어졌다.  결투로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적포도주를 얼굴에 붓고 훈장처럼 보여주며 다녔다.  그러나 결투는 불법이었다.  불법을 한 학생은 대학 학생 감옥으로 보내졌다.  학생 감옥은 1545년에 세워졌다.  감옥은 습하고 추웠으나 학생들은 강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손님 방문이 가능했고 음식도 배달해 먹을 수 있었다.  벽에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하기도 하였다.  음주가 허용되어 술에 취해 밤에 고성방가를 하곤 했는데 이런 치기 어린 행동은 주변에 사는 주민과 경찰을 피곤하게 했다.  학생 감옥은 1914년 폐쇄되었고 관광객이 방문하는 볼거리로 변했다. 

 

오늘날 학생 33.000명과 교직원 10.000명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다니고 있다.  참고로 하이델베르크 인구는 15만 명이다.  졸업생으로는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작가 안나 제거스(Anna Seghers), 헬무트 콜(Helmut Kohl) 전 수상 등이 있다.  지금까지 10명의 교수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인체의 신비전>으로 유명한 군터 폰 하겐스(Gunther von Hagens)는 하이델베르크 의대 교수로 20년간 재직하였다.  하이델베르크에는 그가 운영하는 <인체의 신비> 박물관이 있다. 

베를린대학으로 가기 전 헤겔이 철학교수로  머물렀던 곳(1817년 1월~18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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