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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Jan 03. 2019

역사가 숨 쉬는 슈파이어

슈파이어(Speyer)는 독일 남서부 라인 강 연안에 있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서쪽으로 차로 25분 정도 걸린다. 작지만 한때는 잘 나갔던 도시다. 도시를 거닐다 보면 대단했겠다는 흔적들이 눈에 띈다.



슈파이어는 고대 로마 시절 게르만족 등 이민족을 막는 라인강 방어의 군사도시였고 상업 중심지였다. 로마군이 진주하면 우선 포도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이 이 곳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된 325년 산 와인을 팔츠 역사박물관 (Das Historische Museum der Pfalz)에 가면 볼 수 있다. 1867년 무덤 발굴 도중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325년 산 와인
<팔츠 역사 박물관 (Das Historische Museum der Pfalz)>


번성을 구가하던 슈파이어는 5세기에 반달족과 훈족 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암흑과 혼란의 시대가 지나고 중부 유럽을 석권한 신성로마제국(962~1806년) 오토(Otto) 대제는 969년 슈파이어에 주교를 임명하였다. 당시 주교 임명은 교황이 아닌 황제의 고유 권한이었다. 이후 게르만의 가톨릭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 

잘리어 왕조 때(Das Geschlecht der Salier, 1024~1125) 슈파이어는 제국의 중심도시로 쾰른과 독일 기독교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였고 유럽 전체로는 베네딕트 수도회가 융성한 프랑스 클뤼니와 경쟁하였다. 


잘리어 가문출신의 새로운 독일왕 콘라드 2세(Konrad II.)는 1026년 롬바르드 왕이 되었다.  1027년 로마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갖는다. 그리고 1033년 프랑스 지역의 부르고뉴 왕이 되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자신의 가문과 황제의 권위를 연결시키기 위해 1027년 가문의 근거지인 슈파이어에 왕가 지하무덤이 포함된 성당을 짓겠다고 결심하였다.  이 결심이 슈파이어 대성당(Der Kaiserdom, St. Maria und St. Stephan)의 시작이다.  


슈파이어 성당은 아헨성당과 비교하면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지어졌다.  아헨성당은 16각형 안에 8각형공간으로 이루어진 다소 복잡한 구성이다.  이에  반해 슈파이어 성당은 척도와 비례관계를 가진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평면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30년간의 공사를 거쳐 1061년 1차로 성당을 완성하였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기다란 라틴 십자가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다. 중앙입구로 들어가는 세로 통로가 길고 가로로 뻗은 통로와 정사각형의 교차공간을 갖는다.  


바깥에서 보면 제단이 있는 성가대석은 아치가 줄지어 채광창을 얼싸 안듯이 반원형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지하무덤은 천장 높이만 7m로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지하무덤에는 8명의 왕, 4명의 왕후,주교들이 안장되어 있다. 

<슈파이어 대성당(Der Kaiserdom, St. Maria und St. Stephan)>


하인리히 4세(Heinrich IV.)는 1082년에서 1106년에 걸쳐 성당 외관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기존의 목조 천장을 벽돌로 쌓아 올린 원형 천장으로 바꿔 완성하였다. 성당 동서 길이는 134m, 동쪽 끝 첨탑의 높이는 71.2m, 그리고 내부 중앙(nave)의 높이는 33m이다. 서쪽 입구보다는 동쪽 제단을 강조하여 강력해진 가톨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성당내부

성당은 순수한 종교적 열망보다는 경쟁 관계였던 교황권에 대항하는 정치 종교적 목적에 의해 세워졌다. 결국 교황과 힘겨루기를 하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파문을 받는다.  이에 추운 겨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카노사로 교황을 직접 찾아가 3일간 맨발로 성문 밖에서 기다린 끝에 용서를 받았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찧으며 절한 것은 하인리히에 비하면 나은 상황인 듯 보인다. 

성당 종교화

슈파이어 성당은 17세기 왕위 계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18세기에 복원에 시작되었는데 원형과 다르게 진행되었다.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는 성당 내부에 성모 벽화를 그릴 것을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왕명에 따라 1846년부터 7년간 요하네스 슈라우돌프(Johann von Schraudolph)를 비롯한 나사렛 파 화가들이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이 벽화는 1957년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형복원을 위해 떼어내어 황제실(Kaisersaal)에 옮겨 전시되고 있다. 


1967년 성당은 잘리어 왕조 때의 원형으로 복원되었고 198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독일은 짓기도 오래 걸려 짓고 복원도 오랜 걸린다. 이런 모습이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나에겐 답답하게 느껴지다가 완성된 모습을 보면 한국에서 볼 수 없던 꽉 찬 느낌을 받는다. 


스페인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la) 길을 떠나는 성자 야곱의 상이 시내 중심에 있다. 산티아고는 야곱의 스페인식 발음이다. 오래전 독일의 순례자들은 뉘른베르크(Nuernberg)에서 출발하여 로텐부르크(Rothenburg)를 경유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프랑스 메츠(Metz)에서 멈추었다. 이후 다음 경유지인 프랑스 베젤레 (Vezelay)나 르퓌(Le Puy)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슈파이어에서 지팡이를 바꾸고 물과 빵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모습이 그려진다. 오랜 여행에 행색은 초라해졌어도 눈만은 열정에 빛나지 않았을까.

야곱상


슈파이어는 12-13세기 동안의 주교와 시민 사이의 대립 끝에 1294년 자유 제국 도시가 되었다. 이후 시민들은 의회를 구성하고 화폐를 제조하며 상업도시로 발전해갔다. 도시를 거닐다 보면 번영을 구가했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도시를 지키던 성벽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성문(Das Altpörtel) 그리고 어시장, 목재 시장터를 보면 활기찼던 중세 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성문(Das Altpörtel)


성벽 잔재
어시장을 기념하는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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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독일 상업의 중심지 슈파이어에는 유대인들이 중심 역할을 하였다. 1084년 주교 비숍 뤼디거 후즈만(Rüdiger Huzmann)과 황제의 장려로 유대인들은 슈파이어에 거점을 두고 살게 된다. 유대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남유럽 주요 도시에 지점을 설치하고 이슬람 세계는 물론 극동아시아까지 무역을 하고 금융업을 영위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349년 발생한 흑사병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면서 순식간에 유대인들은 쫓겨나고 거주지는 폐허가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다시 자리를 잡던 유대인들은 19세기와 2차 세계대전에 다시 발발한 반유대주의로 완전히 사라졌다. 90년대 중반 유대인들이 다시 이 곳에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즘 극우단체와 이슬람 이주민에 의한 반유대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어 안타깝다. 

유대인기념관(Judenhof)


1529년 슈파이어에 19명의 신교도 제후와 자유도시 대표들이 모였다. 그들은 제국회의를 열고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가톨릭 회귀 요구를 거부하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항의서한 (Protestation von Speyer)을 만들고 저항했다. 이것이 신교도를 항의하는 자라는 의미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부르게 된 어원이다.  항의 서한을 받은 카를 5세는 진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비엔나에 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신교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신교는 세력을 확장하였고 슈파이어는 신교도의 중심도시로 발전한다. 루터상이 있는 100미터 높이의 신고딕 양식 기념교회(Die Gedächtniskirche)와 바로크 양식의 루터교 교회(Die Dreifaltigkeitskirche)는 신교의 번성을 보여준다.

기념교회 (Die Gedächtniskirche)
루터상
루터교 교회(Die Dreifaltigkeitskirche) 내부
루터교 교회(Die Dreifaltigkeitskirche)


1689년 화재로 전소된 시청사를 1712년 짓기 시작하여 1725년 완성하였다. 내부 강당은 초기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졌고 현재 실내 관현악 연주장으로 애용되고 있다.

<후기 바로크양식을 보여주는 시청사 건물>


프랑스혁명 후인 1797년 나폴레옹은 슈파이어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주교령을 소멸시켰다.  슈파이어는 1815년 바이에른 왕국에 편입되었다가 1838년 팔츠 주의 주도가 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행정구역인 라인란트팔츠주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 라인란트 팔츠 주도는 마인츠(Mainz)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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