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역사가 숨 쉬는 슈파이어

by 자행가

슈파이어(Speyer)는 독일 남서부 라인 강 연안에 있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서쪽으로 차로 25분 정도 걸린다.


작지만 한때는 잘 나갔던 도시다. 곳곳에 대단했겠다는 흔적들이 눈에 띈다.



슈파이어는 고대 로마 시절 게르만족 등 이민족을 막는 라인강 방어의 군사도시였다. 그리고 상업 중심지였다.


로마군은 진주하면 우선 포도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이 이곳에 있다. 팔츠 역사박물관 (Das Historische Museum der Pfalz)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된 325년 산 와인이 전시되어 있다. 1867년 무덤 발굴 도중 발견되었는데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4.jpg 325년 산 와인
<팔츠 역사박물관 (Das Historische Museum der Pfalz)>


슈파이어는 5세기에 반달족과 훈족 등의 침입으로 파괴된다. 한동안 암흑과 혼란의 시대가 도시를 지배했다.


969년 신성로마제국(962~1806년) 오토(Otto) 대제는 슈파이어에 주교를 임명하였다. 당시 주교 임명은 교황이 아닌 황제의 고유 권한이었다. 이후 가톨릭 중심 도시로 발전한다. 잘리어 왕조 때(Das Geschlecht der Salier, 1024~1125)는 제국의 중심도시로 쾰른과 독일 기독교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였다. 유럽 전체로는 베네딕트 수도회가 융성한 프랑스 클뤼니와 경쟁하였다.


슈파이어 대성당(Der Kaiserdom, St. Maria und St. Stephan)이 도시 입구에 우뚝 서 있다. 이 성당은 잘리어 가문출신의 독일왕 콘라드 2세(Konrad II.)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1027년) 직후, 그는 가문과 황제의 권위를 연결시키고 싶었다. 1027년 가문의 근거지인 슈파이어에 왕가 지하무덤이 포함된 성당을 짓기 시작한다.


슈파이어 성당은 아헨성당과 비교하면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지어졌다. 아헨성당은 16 각형 안에 8 각형공간으로 이루어진 다소 복잡한 구성이다. 이에 반해 슈파이어 성당은 척도와 비례관계를 가진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평면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30년간의 공사를 거쳐 1061년 1차로 성당을 완성하였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기다란 라틴 십자가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다. 중앙입구로 들어가는 세로 통로가 길고 가로로 뻗은 통로와 정사각형의 교차공간을 갖는다. 제단이 있는 성가대석은 아치가 줄지어 반원형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지하무덤은 천장 높이만 7m로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지하무덤에는 8명의 왕, 4명의 왕후, 주교들이 안장되어 있다.

6.jpg <슈파이어 대성당(Der Kaiserdom, St. Maria und St. Stephan)>


하인리히 4세(Heinrich IV.)는 잘리어 왕조 세 번째 왕으로 1082년부터 1106년까지 성당 외관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목조 천장을 벽돌 원형 천장으로 바꿔 완성시켰다. 성당은 길이 134m, 동쪽 끝 첨탑의 높이 71.2m, 그리고 내부 중앙(nave)의 높이 33m가 탈바꿈하였다. 서쪽 입구보다는 동쪽 제단을 강조하여 강력해진 가톨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성당중축은 순수한 종교적 열망보다는 경쟁 관계였던 교황권에 대항하는 정치 종교적 목적이 강했다.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다. 1077년 1월 추운 겨울날 이태리 카노사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교황에게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3일간 용서를 구하는 개망신을 몸소 시전한 인물이다. 물론 나중에 복수를 하지만.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찧으며 절한 것은 하인리히 4세에 비하면 덜 굴욕적으로 보인다.

9.jpg 성당내부


8.jpg 성당 종교화

성당은 17세기 왕위 계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복원은 원형과 다르게 진행되었다.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는 성당 내부에 성모 벽화를 그릴 것을 지시하였다. 1846년부터 7년간 요하네스 슈라우돌프(Johann von Schraudolph)를 비롯한 나사렛 파 화가들이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이 벽화는 1957년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형복원을 위해 떼어내어 황제실(Kaisersaal)에 옮겨 전시되고 있다.


1967년 성당은 잘리어 왕조 때의 원형으로 복원되었고 198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유럽은 짓는 것도 오래 걸리고 복원도 한참이다. 이런 유럽의 일하는 방식이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나에겐 답답하다. 그러나 완성된 모습을 보면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꽉 찬 느낌을 받는다.

7.jpg


시내 중심에는 스페인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la)로 떠나는 성자 야곱의 상이 있다. 산티아고는 야곱의 스페인식 발음이다. 오래전 독일의 순례자들은 뉘른베르크(Nuernberg)에서 출발하여 로텐부르크(Rothenburg)를 경유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프랑스 메츠(Metz)에서 멈추었다. 이후 다음 경유지인 프랑스 베젤레 (Vezelay)나 르퓌(Le Puy)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도시에 도착해 지팡이를 바꾸고 물과 빵으로 허기를 달래는 순례자. 행색은 초라하지만 눈만은 열정에 맑게 빛났으리라.

23.jpg 야곱상


슈파이어는 12-13세기 동안의 주교와 시민 사이의 대립 끝에 1294년 자유 제국 도시가 되었다. 이후 시민들은 의회를 구성하고 화폐를 제조하며 상업도시로 발전해 갔다. 곳곳에 번영을 구가했던 흔적이 보인다. 도시를 지키던 성벽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성문(Das Altpörtel) 그리고 어시장, 목재 시장터를 보면 활기찼던 중세 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10.jpg 성문(Das Altpörtel)


11.jpg 성벽 잔재
12.jpg 어시장을 기념하는 조형물

중세 슈파이어에는 유대인들이 중심 역할을 하였다. 1084년 주교 비숍 뤼디거 후즈만(Rüdiger Huzmann)과 황제의 장려로 유대인들은 슈파이어에 거점을 두고 정착한다. 유대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남유럽 주요 도시에 지점을 설치하고 이슬람 세계는 물론 극동아시아까지 무역을 하고 금융업을 영위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349년 발생한 흑사병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면서 순식간에 유대인들은 쫓겨나고 거주지는 폐허가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다시 자리를 잡던 유대인들은 19세기와 2차 세계대전에 다시 발발한 반유대주의로 완전히 사라졌다. 90년대 중반 유대인들이 다시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즘 극우단체와 이슬람 이주민에 의한 반유대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어 안타깝다.

13.jpg 유대인기념관(Judenhof)

1529년 슈파이어에 19명의 신교도 제후와 자유도시 대표들이 모였다. 그들은 제국회의를 열고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가톨릭 회귀 요구를 거부하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항의서한 (Protestation von Speyer)을 만들고 저항했다. 이것이 신교도를 항의하는 자라는 의미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부르게 된 어원이다. 항의 서한을 받은 카를 5세는 진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비엔나에 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신교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신교는 세력을 확장하였고 슈파이어는 신교도의 중심도시로 발전한다. 루터상이 있는 100미터 높이의 신고딕 양식 기념교회(Die Gedächtniskirche)와 바로크 양식의 루터교 교회(Die Dreifaltigkeitskirche)는 신교의 번성을 보여준다.

15.jpg 기념교회 (Die Gedächtniskirche)
17.jpg 루터상
19.jpg 루터교 교회(Die Dreifaltigkeitskirche) 내부
18.jpg 루터교 교회(Die Dreifaltigkeitskirche)


1689년 화재로 전소된 시청사를 1712년 짓기 시작하여 1725년 완성하였다. 내부 강당은 초기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졌고 현재 실내 관현악 연주장으로 애용되고 있다.

22.jpg <후기 바로크양식을 보여주는 시청사 건물>


프랑스혁명 후인 1797년 나폴레옹은 슈파이어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주교령을 소멸시켰다. 슈파이어는 1815년 바이에른 왕국에 편입되었다가 1838년 팔츠 주의 주도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행정구역인 라인란트팔츠주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 라인란트 팔츠 주도는 마인츠(Mainz)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낭만 하이델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