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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Jan 03. 2019

평화 아우크스부르크

대신 조건이 있다. 거주자는 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매일 3회 야곱 푸거에 대한 기도를 해야 했다.  그는 주민의 사생활을 존중해 이행은 각자 양심에 맡겼다. 통행금지도 있었다.  밤 늦게 들어오면 1페니의 벌금을 내야 했다.  이유는 술을 먹거나 매춘활동을 해 늦게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푸거는 일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입주민도 같은 엄격한 삶을 요구하였다.


2차 세계대전으로 푸거라이는 파괴되었으나 1950년에 다시 지어졌고 현재 67채 140호실로 150명이 살고 있다.  푸거 가문은 지금도 부동산과 산림업에서 나온 돈으로 푸거라이를 개보수하는데 쓰고 있다. 대단한 조상에 대단한 자손들이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아우크스부르크 중심지에 푸거하우스 건물이 있다.  푸거가 황제와 사제들을 만나던 이곳은 지금 변호사 의사 회계사무실, 상점이 입주해 있다.  푸거의 이름을 가진 은행도 입주해 있다.  이 은행은 지금 뉘른베르크 보험회사에 속해 있고.  다만 정통성 유지차원에서 푸거 가문이 소량의 지분을 갖고 있다.  

야곱 푸거는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와 카알 5세(Karl V.)에 금융대출을 해주면서 구리와 은의 독점 판매 권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교황과 거래하며 돈을 빌려주고 화폐 주조권 등 경제적 이권을 챙겼다.  평민출신으로 귀족의 지위까지 오른 그는 중세유럽의 정치 경제를 막후에서 좌지우지하였다.


그가 죽었을 당시 그의 재산은 유럽내 총생산의 2퍼센트를 육박하였다.  이는 금세기 최고의 부호인 록펠러보다도 많은 액수이다.   


그런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을 한다. 바로 세계 최초 사회복지시설인 푸거라이(Die Fuggerei)이다. 시내 중심에 있는 시청사를 돌아 언덕 밑으로 내려가면 레히강으로 흘러드는 개울가 기슭에 푸거라이가 보인다.  이런 일을 한 그의 성격은 온화하고 자상할 것 같지만 아니다.  그는 고집불통에 이기적이고 엉큼하고 냉정했다.  최측근이 빚을 갚지 않고 죽자 유가족을 구빈원으로 보내버린 경우도 있다.


야곱 푸거는 집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자비로 1516년 공사를 시작 1523년 공동임대주택을 완성하였다.  각 주택은 면적이 60 제곱미터로 침실 둘 거실 하나 난로가 있는 부엌 하나로 총 4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화장실은 없었고 요강을 사용 오물은 개울에 버렸다. 


푸거라이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건축물이었다. 일부러 주택단지내 광장을 만들지 않았는데 이유는 노동자들의 사생활이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푸거라이는 무질서한 중세 건축물과 달리 대칭 통일성 비례를 중시한 건축물이다.  지붕높이를 주위 벽과 맞추고 집들 사이에 직선으로 길을 만들었다. 동일한 주택구조로 비용절감을 할 수 있었다.  집집마다 숫자로 지번을 적어 붙이고 출입문 손잡이 모양을 다르게 하여 사람들이 쉽게 집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가난한 노동자를 위한 섬세한 배려가 엿보인다.   그리고 당시 부자집처럼 박공지붕을 얹었다.    



입주할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노동자였다.  거지는 거부되었다.  당시 부자 중에는 거지를 도와주면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푸거는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막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은 도와주지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시 1년에 굉장히 적은 금액인 1 굴덴(Gulden)을 내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살도록 하였다.  당시 임대료 대비 4분의 1가격이었다.  이 가격은 변하지 않고 현재에도 동일하게 내고 있다. 일 년에 88센트(1000원)이다. 거의 공짜다. 독일에서 88센트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아우크스부르크에 하층민을 위한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을 만든 사람이 있다. 바로 야곱 푸거(Jakob Fugger,1459-1525)이다.  15세기 유럽은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암흑의 중세시대가 끝나고 학문이 발전하고 상업, 무역, 경제활동이 중요해졌다. 아우크스부르크 상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죽자 14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 있는 자신의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여 19년 동안 형들과 회사를 운영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바이에른 주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27만 명 정도이다. 독일에서는 인구 20만이 넘으면 대도시로 분류한다.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가 많은 한국 포함 아시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분류법이다. 독일은 인구 100만 명 넘는 도시는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3곳뿐이다. 


바이에른주에 속해 있으나 슈투트가르트와 같은 슈바벤 지역으로 슈바벤 사투리와 바이에른 사투리가 혼재되어 쓰인다. 슈바벤 사람들은 인색하다고 독일 내에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잘 산다. 


아우크스부르크는 BC 15년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도시이다. 그래서 이름이 아우크스부르크이다. 독일에서는 트리어(Trier) 다음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이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군단 주둔지로 개발되었다. 이후 라에티아지방(Raetia)의 주도로서 번성하였다. 


로마가 멸망하고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8세기 교구청이 설치되고 가톨릭 주교의 지배를 받았다. 1276년 합스부르크 왕인 루돌프(Rudolf von Habsburg)의 명령으로 제국 자유도시로 되어 발전을 하게 된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에 인접해 독일 내륙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상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아우크스부르크에 가난한 도시노동자를 위한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을 만든 사람이 있다. 바로 야곱 푸거(Jakob Fugger,1459-1525)이다.  15세기 유럽은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암흑의 중세시대가 끝나고 학문이 발전하고 상업, 무역, 경제활동이 중요해졌다. 아우크스부르크 상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죽자 14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 있는 자신의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여 19년 동안 형들과 회사를 운영하였다. 


야곱 푸거(Jakob Fugger)

야곱 푸거는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와 카알 5세(Karl V.)에 금융대출을 해주면서 구리와 은의 독점 판매 권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교황과 거래하며 돈을 빌려주고 화폐 주조권 등 경제적 이권을 챙겼다.  평민출신으로 귀족의 지위까지 오른 그는 중세유럽의 정치 경제를 막후에서 좌지우지하였다.


그가 죽었을 당시 그의 재산은 유럽내 총생산의 2퍼센트를 육박하였다.  이는 금세기 최고의 부호인 록펠러보다도 많은 액수이다.   


그런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을 한다. 바로 세계 최초 사회복지시설인 푸거라이(Die Fuggerei)이다. 시내 중심에 있는 시청사를 돌아 언덕 밑으로 내려가면 레히강으로 흘러드는 개울가 기슭에 푸거라이가 보인다.  이런 일을 한 그의 성격은 온화하고 자상할 것 같지만 아니다.  그는 고집불통에 이기적이고 엉큼하고 냉정했다.  최측근이 빚을 갚지 않고 죽자 유가족을 구빈원으로 보내버린 경우도 있다.


야곱 푸거는 집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자비로 1516년 공사를 시작 1523년 공동임대주택을 완성하였다.  각 주택은 면적이 60 제곱미터로 침실 둘 거실 하나 난로가 있는 부엌 하나로 총 4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화장실은 없었고 요강을 사용 오물은 개울에 버렸다. 


푸거라이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건축물이었다. 일부러 주택단지내 광장을 만들지 않았는데 이유는 노동자들의 사생활이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푸거라이는 무질서한 중세 건축물과 달리 대칭 통일성 비례를 중시한 건축물이다.  지붕높이를 주위 벽과 맞추고 집들 사이에 직선으로 길을 만들었다. 동일한 주택구조로 비용절감을 할 수 있었다.  집집마다 숫자로 지번을 적어 붙이고 출입문 손잡이 모양을 다르게 하여 사람들이 쉽게 집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가난한 노동자를 위한 섬세한 배려가 엿보인다.   그리고 당시 부자집처럼 박공지붕을 얹었다.    

입주할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노동자였다.  거지는 거부되었다.  당시 부자 중에는 거지를 도와주면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푸거는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막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은 도와주지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시 1년에 굉장히 적은 금액인 1 굴덴(Gulden)을 내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살도록 하였다.  당시 임대료 대비 4분의 1가격이었다.  이 가격은 변하지 않고 현재에도 동일하게 내고 있다. 일 년에 88센트(1000원)이다. 거의 공짜다. 독일에서 88센트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푸거라이(Die Fuggerei)


대신 조건이 있다. 거주자는 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매일 3회 야곱 푸거에 대한 기도를 해야 했다.  그는 주민의 사생활을 존중해 이행은 각자 양심에 맡겼다. 통행금지도 있었다.  밤 늦게 들어오면 1페니의 벌금을 내야 했다.  이유는 술을 먹거나 매춘활동을 해 늦게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푸거는 일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입주민도 같은 엄격한 삶을 요구하였다.


2차 세계대전으로 푸거라이는 파괴되었으나 1950년에 다시 지어졌고 현재 67채 140호실로 150명이 살고 있다.  푸거 가문은 지금도 부동산과 산림업에서 나온 돈으로 푸거라이를 개보수하는데 쓰고 있다. 대단한 조상에 대단한 자손들이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아우크스부르크 중심지에 푸거하우스 건물이 있다.   푸거가 황제와 사제들을 만나던 이곳은 지금 변호사 의사 회계사무실, 상점이 입주해 있다.  푸거의 이름을 가진 은행도 입주해 있다.  이 은행은 지금 뉘른베르크 보험회사에 속해 있고.  다만 정통성 유지차원에서 푸거 가문이 소량의 지분을 갖고 있다.  

푸거가문 건물(Die Fuggerhaeser)
건물내 푸거은행


제국 자유도시가 된 후 아우크스부르크에는 황제와 제후들이 모여 국가 대사를 논하였다. 그중 유명한 신구교 평화조약이 1555년 합의되었다.  ‘그 지역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가 정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이후 신교는 공식적으로 독일에서 승인을 받고 구교도와 신교도가 공존하게 된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건축물이 막시밀리안 거리에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바로 가톨릭 성당(Basilika St. Ulrich und Afra)과 신교 교회(St. Ulrichskirche)이다. 특이하게 성당과 교회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17세기 초 부유했던 아우크스부르크는 자신의 도시를 대표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시청사를 짓고자 하였다. 이에 건축가 엘리아스 홀(Elias Holl, 1573-1646)은 옛 건물을 헐고 1615년 시작하여 1620년에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 건물을 완성하였다. 시청 건물은 독일 르네상스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시청사 꼭대기에는 시의 상징인 청동 잣나무 열매가 쌍독수리 벽화 위에 우뚝 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꼭대기 층에 황금의 방(der Goldene Saal)이 있다. 거대한 내부 공간이 금박과 예술적인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시청사, 크리스마스시장이 한창이다.
황금의 방


엘리아스 홀의 건축은 단순하고 실용적이다. 그는 시청 건물 외에도 많은 건물을 중심가인 막스밀리안 거리(Maximilianstraße)에 세웠다. 한창때 500명의 일꾼들과 함께 14개의 건축물을 동시에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30년 전쟁으로 아우크스부르크는 재정난으로 더 이상 건축사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교도인 관계로 가톨릭인 황제 군대가 도시를 점령함에 따라 더 이상 도시건설책임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전쟁인 한창이던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시청사는 완전히 파괴되어 벽체만 앙상히 남게 되었다.  전쟁 후 시청사는 재건되었다. 그리고 황금의 방은 1980년 초반 다시 지어졌고 현재 접견실과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인도 입장료를 내면 들어가 볼 수 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시청사


신구교도 간의 갈등이 다시 표출된 30년 전쟁(1618-1648) 이 끝나자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을 다시 확정하게 되고 신교도에 대한 박해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은 완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다. 


1650년 이후 매년 8월 8일이 되면 종교적 갈등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된 평화를 기리는 평화축제(Hohe Friedensfest)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리게 되었다. 1950년 바이에른 주의회에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이 날은 국가적으로 유일하게 승인된 아우크스부르크 지역만을 위한 도시 공휴일이다. 평화축제는 2008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 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30년 전쟁(1618-1648)의 중심에 있었다. 30년 전쟁은 신구교도 간의 종교 갈등으로 발발하였으나 그 기저에는 유럽 대륙의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30년 전쟁 전 가톨릭과 신교도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지배를 양분하고 있었다. 1629년 가톨릭 세력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보다 많은 지배권을 원했다. 그러나 1632년 신교도인 스웨덴 군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가톨릭교인 신성로마 황제 군대 가 도시를 포위하고 식량의 반입을 막았다. 이에 도시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고통받게 되었다.


이 당시와 관련된 전설이 아우크스부르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빵 굽는 일을 하는 콘라드 하커(Konrad Hacker)가 도시를 구한 것이다. 도시에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콘라드 하커는 황제군을 속이고 자신의 도시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톱밥으로 빵을 만들어 성벽으로 갔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황제 군대의 시선을 모았다. 그런 다음 성 밖 해자로 빵을 던졌다. 이에 황제의 군대는 시민들이 굶주리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화가 난 군인들이 하커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황제의 군대는 철수했다.

제빵사 하커의 상


이 이야기는 18세기 중반 처음 알려지게 되었고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쟁 중에 시민들이 굶주림에 고통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1635년 3월 도시는 황제의 군대 손에 떨어진다. 그를 기리는 왼손에 빵을 든 하커의 상(Steinerner Mann Statue)이 성벽에 서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인형극이 유명하다. 아우크스부르크 인형극장(die Augsburger Puppenkiste) 역사는 2차 세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3년 발터 외미헨은 부인과 딸과 함께 인형극단을 창단했다. 그러나 극장은 전쟁으로 불타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인형극장을 만들었다.  1948년 우리에게도 친숙한 동화인 ‘장화 신은 고양이’ 인형극을 시작으로 많은 인형극을 무대에 올렸다. 1953년부터 1990년대까지 TV로도 방연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이들의 작품 중에도 한국에도 소개된 동화 짐 크노프(Jim Knopf) 시리즈는 특히 사랑받는 작품이다. 보기에는 단순한 인형극인데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은 6년간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형극


인형극 외에도 연극도 유명하다. 아우크스부르크 태생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1956)를 기리는 연극제가 1월에 열린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나치가 책 판매를 금지하자 조국을 떠나 북유럽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전쟁 후에는 동독에 정착하여 창작생활을 하였다 1956년 동독에서 죽었다. 시내의 그의 생가에는 브레히트 박물관이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아우크스부르크는 또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아버지의 고향이다. 그래서 5월에 모차르트 음악제와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바이올린 경연대회가 열린다.  시내 중심가에 아버지 모차르트의 이름을 딴 레오폴드 모차르트 음악대학(Leopold Mozart Zentrum)이 있다.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은 디젤엔진을 발명하고 아우구스부르크에 디젤엔진공장(MAN)을 설립한다.


레오폴드 모차르트 음악대학(Leopold Mozart Zent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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