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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Jan 04. 2019

중세의 시작 아헨

아헨(Aachen)은 독일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 근처에 있다. 아헨이 속한 지역은 루르 공업지역으로 1960-70년대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광부로 가서 일하던 곳이다. 인구는 25만 명 정도이며 섬유 유리 기계공업이 발달하였다. 

 

온천이 있는 관계로 로마군이 주둔하여 일찍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후 중세 유럽을 평정한 프랑크 왕국의 카를(Karl der Große, 프랑스명 샤를마뉴) 대제가 아헨을 카롤링거 왕조(751-987)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아헨을 정치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고 싶었다. 

 

카를은 771년 동생 카를만이 죽자 동생의 영토를 빼앗아 프랑크 제국의 단일지배자가 되었다. 이 후 영토확장에 나서 롬바르드(롬바르디아 지방) 제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피레네 산맥 동쪽으로는 헝가리까지 정복하였다.  정복지에는 기독교를 전파시켰다.  800년 그는 로마에서 대관식을 갖는다. 그리고 서로마 멸망 후 350년만에 옛 서로마지역을 대표하는 황제가 되었다.

 

카를은 고대로마와 비잔틴 예술을 바탕으로 정치 건축 출판 예술 등에 로마 제국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 시대를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카를은 전쟁 중 아헨의 온천에 머물며 휴식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이전 메롤링거 왕조와의 단절과 새로운 로마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아헨을 수도로 정한다. 

 

헨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아헨 대성당(der Aachener Dom)이다.   카를 대제는 건축가 오도 폰 메츠(Odo von Metz)에게 궁전예배당(Pfalzkapelle)의 건축을 명한다.  이를 시작으로 대성당의 건축 역사가 시작된다.  

 

카를 대제(Karl der Große)


지역에서 많은 나오는 석회암 사암 화강암으로 구조를 만들고 이탈리아산 대리석과 그리스에서 가져온 기둥으로 내부를 치장하였다. 천장은 보라색 가운을 입은 예수를 그린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나 없어졌고 지금의 모습은 1870년~1873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천장


서쪽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16 각형의 외벽으로 된 원형 공간이 나온다. 원형 공간은 8개의 기둥으로 다시 팔각형 중앙 공간과 회랑을 구분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 건축양식인 기다란 십자가 모양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내부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서있는 평면 공간에 비해 높이가 높아 흡사 고층건물을 보는 듯하다. 하느님이 사는 하늘을 신성시하는 당시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와 숨죽이며 천장을 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카를 대제는 서쪽에 위치한 청동문을 지나 원형 공간에 들어온 후 2층에 있는 왕좌에 앉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왕의 의자는 유럽을 평정한 정복자의 의자 치고는 소박하다. 동쪽에는 성직자가 의식을 집행하는 제단이 있다.   카를 대제의 왕관도 보관되어 있다.  

 

그가 죽은 후 1531년까지 600년 동안 30명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2층 왕좌석


1215년 카를 대제의 유골은 황금관에 옮겨졌고 지금은 합창단석 부근 벽에 놓여있다. 1238년 성모 마리아의 성물(der Marienschrein)이 합창단석 앞쪽에 모셔져 있다.  이런 이유로 14세기 이후 아헨은 로마와 스페인 산티아고와 더불어 순례자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아헨 대성당에는 카를 대제의 왕관이 보관되어 있다. 그가 죽은 후 1531년까지 600년 동안 30명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아헨 대성당(der Aachener Dom)

성당은 시대변화에 따라 개축을 하며 조금씩 변화하였다. 13-14세기에는 동쪽 제단에 합창단석이 만들어져 동쪽 부분이 길어졌다.  1414년에는 합창단석 부근 벽면에 1000제곱미터에 달하는 모자이크 유리창(Glashaus von Aachen)이 만들어졌다. 이후 바로크 양식의 지붕과 신고딕양식의 첨탑이 추가되었다. 역사와 예술성을 갖춘 아헨 대성당은 1978 년 독일 최초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시내 중심을 걷다 보면 뷔헬거리(Büchelstrasse)에 바카우프(die Bahkauv)라 불리는 청동 괴물상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옛날 처녀들이 몸을 씻는 샘이었다.  이 샘에는 괴물 바카우프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소리를 치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한밤의 소음에 잠을 깬 괴물은 화가 났다. 괴물은 빠르게 주정꾼의 어깨에 올라타고 으르렁거렸다.  주정꾼들은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괴물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주정꾼의 돈을 빼앗았다. 무서운 괴물의 모습에 비해서 결말은 다소 우스꽝스럽다.  추측하건대 밤늦게 술 먹고 소란 피우지 말라는 소리 같다. 독일에서는 밤 10시 이후 소음에 대해 무척 엄격하다. 


바카우프(Die Bahkauv)


아헨 대성당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파티를 열어 놀기 좋아하던 아헨 사람들은 성당을 지을 돈이 모자랐다. 성당은 카를 대제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 지어야만 했다. 하지만 돈을 마련할 묘책이 없었다.  

이때 옷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나타나서 교회를 짓는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 대신 그 대가로 성당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의 영혼을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조심스레 그를 보니 옷사이로 발굽 자국과 이마에 자그마한 뿔이 보였다. 악마인가 싶었지만 그의 제안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몇 주 후 성당은 완성되었고 황제가 돌아왔다. 
 
악마는 청동문 뒤에 숨어 첫 번째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는지 숲으로 가서 늑대를 잡아 성당 안으로 집어넣었다.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갑자기 나타난 악마는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곧 악마는 사람이 아닌 늑대라는 걸 알아차렸다. 화가 난 악마는 밖으로 나와서 문을 꽝하고 닫아버렸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을 눌러 커다란 구멍이 내버렸다. 성당 청동문 정면 장식을 보면 커다란 구멍이 있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게 독일식 유머인가 싶다.

청동문


아헨 시청사(Aachener Rathaus)는 카를 대제의 연회장 터였다. 대관식 이후 왕들이 연회를 열고 축하하던 곳이었다.  14세기 시의회와 신성 로마 황제의 합의하에 시청사를 다시 짓기로 하였다. 1349년 고딕 양식의 새로운 시청사가 지어졌다. 그러나 1649년 대화재로 폐허가 되었고 17-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시청사

19세기 시 담당 건축가인 프리드리히 아크(Friedrich Ark)가 바로크 양식을 걷어내고 건물 정면부에 네오고딕 양식의 독일 군주 50명의 인물상으로 벽을 장식하였다. 시청사 내부에는 여러 방들이 있다. 그중 대관식 홀(Krönungssaal)에는 1847년  젊은 화가 알프레드 레텔(Alfred Rethel)이 그린 카를 대제의 생을 담은 프레스코화가 있다.  평화의 방(Friedenssaal)도 유명한데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전 서명을 기념하여 당시 불리고 있던 붉은 방(Roter Saal)에서 이름을 바꾼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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