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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Feb 25. 2019

2월, 타인에게 주는 힘을 주는 것

너무 다른 배경의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때 <사람, 장소, 환대>

홍콩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하버시티 야경도 딤섬도 아닌 일요일 오후의 필리핀 여성들입니다. 그녀들은 공원도 뒷골목도 아닌 곳에, 오만한 풍채의 건물들 사이마다, 자동차들이 함부로 매연을 뿜고 가는 대로변 구석구석마다 버섯이 돋아난 것처럼 삼삼오오 모여있었죠. 분명 잘못 맞춰진 퍼즐 조각처럼 의아한 장면인데 그녀들의 표정이며 돗자리까지 편 앉음새가 너무나 태연해서, 저에게는 너무나 강렬한 홍콩의 인상이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그녀들이 가정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부분 맞벌이를 하는 홍콩의 가정을 평일 내내 돌보아주다가 정작 가족들이 모두 집에 오는 일요일에는 집안에 있을 데가 없어서 밀려 나오는 이들이었죠. 카페에 가거나 외식을 할 만큼 사치를 부릴 여력은 없어 거리를 ‘점거’하는 게 오랜 풍습이 되었고, 또 홍콩의 풍경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조금 씁쓸해졌습니다.


“환대는 사람이 될 자리를 주는 행위”라는 이 책의 정의를 곱씹어보다가 그날 그녀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저절로, 지난해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들도요. 홍콩과 한국, 다른 이들에게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이들 사회의 척박함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다른 이들에 대한 편견과 경계의 맞은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마음과 태도가 바로 ‘환대’입니다. 하지만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느껴지죠. 누구에게나 부잣집 잔칫날처럼 베풀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나를 지키려는 생각이 앞서, 어디까지 하면 그나마 환대일까요? 라고 묻고 싶어집니다.


이 책의 저자인 문화인류학자 김현경 선생님은 “절대적 환대가 아닌 환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느껴진다면, 뒤집어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이 세상에 왔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를 맞이한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우리가 받은 것의 일부를 되돌려주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회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함으로써 사람이 되게 한 절대적 환대 위에서만 가능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환대’를 강조하는 것은 자선을 하자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을 하자”는 뜻입니다. 이는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들고,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고,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것을 포함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께 사회의 공공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곧 환대의 행위라고 생각하면 겁먹지 않고 해볼만하지 않느냐고 이 책은 거듭 묻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과 사유를 골똘히 따라가다보면, 좋은 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마음이 뭉클, 하는 순간이 옵니다. 사회가 그러한 환대의 공간이라면, 사람들이 “서로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언젠가 벗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여는” 공간이라면 어떨까, 하고 미처 해보지 못한 생각을 간절히 더듬어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을 우리는 어쩌면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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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환대가 재분배를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하기로 하자.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공간, 갈아입을 옷, 찻주전자와 차를 살 돈 같은 것 말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시작할 때 먼저 장난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아무리 욕심 많은 아이라도 상대방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초대할 수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살림을 나누어준다.(174)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197)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드는 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 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204)


비유컨대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림자를 갖는 것과 같다. 몸에 붙어다니면서 몸의 자리를 표시해주는 무엇, 몸과 닮아있고 몸을 흉내내지만, 몸의 고유한 표정을 모두 지워버리면서 그렇게 하는 무엇, 몸이 태어날 때 함께 나타나고 몸이 죽을 때 함께 사라지는 무엇 말이다. 사람으로 인지된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몸이 아니라 그림자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 교환되는 상호작용의 의례는 개별적인 몸을 향하는 것 같지만, 기실 그림자에 바쳐지는 것이다.(213)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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