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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Feb 28. 2019

2월, 나를 잃어버리는 바람 같은 이야기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힐 때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몽골, 은 아이슬란드나 페루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나라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쳇바퀴 같은 일상과 지루한 관계들, 아무리 애쓴들 한 치의 진전도 없는 것 같은 나로부터 떠나버리고 싶을 때 은밀히 떠올려보곤 하는 가장 비현실적인 지명 중 하나죠. 그러므로 몽골을, 그 중에서도 낯설디 낯선 알타이-투바를 다녀와 쓴 이 책이 “여행기가 아니다”라는 소설가 배수아의 선언은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몽골에서의 생활이란 고비사막의 장관, 낙타와 게르, 그리고 별이 흐드러지는 밤하늘처럼 신비한 경험으로 가득차 있을 듯한데, 작가 자신이 주로 한 일은 “추위에 떨면서 유르테에 불을 피울 야크똥 모으기”였다고 처음부터 강하게 못 박고 있으니, 이 책에서 관광 엽서를 보는 즐거움을 느끼려는 기대는 애당초 포기해야 합니다.


번역가 김명남이 추천사에 적은 대로, 이 책은 배수아 작가가 “자신을 잃어버린” 이야기입니다. 2009년 여름, 알타이-투바 땅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던 그녀는 “나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내가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순간들” 속에서 종종  오직 혼자이다가,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조차 거의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게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해서, 그 기간 동안 어쩌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진짜’ 미소를 지었다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바람. 알타이-투바 땅은 “가슴의 구멍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바람으로 작가를 맞이합니다. 북쪽과 남쪽이 다르지 않고 동쪽과 서쪽을 구별할 수 없이 하염없는 스텝 평원을 걸으면서 작가는 “바늘 없는 나침반의 한가운데를 영원히 서성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데, 그러다가 자신이 낱낱이 흩어져 바람에 삼켜질지 모른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아마도 그녀가 작가로서 가장 집착했을 대상인 언어와 서사도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오갑니다. 그녀를 그곳까지 이끈 ‘영감’이었던 몽골 소설가이자 투바 부족 추장 갈잔 치낙은 첫 만남에서 경고합니다. “유언이 될 수 있는 쪽지를 써라.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라. 이곳은 세계로부터 잊힌 땅이나 마찬가지인 알타이 산악 지대 깊숙한 곳이며, ‘그것’이 언제 어디서 오게 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동행 중 한 명이었던 60대 독일인 의사 한스는 1980년대에 몽골에 의료자원봉사를 왔던 기억을 들려줍니다. 어느 날 그는 한 남자가 죽을 것이며 더 이상 방도가 없다는 슬픈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했는데, 그로부터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멀리 초원에 흩어져 사는  친척과 친구들이 하나둘 찾아왔다고 합니다. 전화도 편지도 없고, 특별히 심부름꾼을 보냈던 것도 아닌데, 그저 그곳을 방문했던 이들이 사방으로 여행하며 전한 말들만으로 소식은 “초원의 불처럼” 퍼져나갔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바람 같은 이야기, 속에서 그 땅의 삶은 이어집니다. 이에 대한 실감, “거대한 물아의 기분”이라거나 “한없이 오래된 살아있는 것들 한가운데 외롭게 살아있음”이라고 작가가 변주해 들려주는 그 체험에 스며들다보면, 질긴 몸이 물에 풀어지는 순간처럼 내 안의 질긴 무엇이 스르륵, 녹아내립니다. 내가 나여야 한다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기 위해 끊임없이 추진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욕망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불안과 혼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드러냄이 아닌 사라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야 우리는 마침내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날 이후 나에게 알타이의 땅은 수없이 많은 세월을 살아낸 늙은 암석과 허무한 시간의 자갈들, 그리고 차가운 흰빛의 커다란 뼈들로 이루어진 장소가 되었다. 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으며 식탁 위에 깔아놓은 비닐 식탁보가 펄럭거리고 머리칼이 얼굴을 가렸으며 옷을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춥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사방은 싸늘하고 냉랭했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가슴의 구멍을 통과해서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으로써 그 구멍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강물은 얼음의 결정 같은 커다란 거품을 송이송이 일으키면서 흘렀다.

그곳은 항상 인간의 체온이 그리운 땅이었다. 퍼실 세제의 향기나 화장실용 오데코롱이 아닌, 살냄새 나는 인간의 몸, 나는 그 점을 지금 너무나 잘 이해한다.(69)


그곳에서 나는 슬픔과도 맞닿아 있는 일종의 거대한 물아의 기분을 느꼈다. 모든 산줄기와 호수마다 특별한 시선과 눈동자가 하나씩 있어서 그것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고, 하지만 그 사로잡힘은 ‘자유롭지 못함’의 개념이 아니라, 내 심장과 호흡이 편안함을 그리워할 때마다 저절로 향하게 되는 돌의 어머니, 쇠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었으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암석과 뼈, 돌과 먼지의 석회빛 풍경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렇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 이후로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 한없이 오래된 살아 있는 것들 한가운데서 나는 외롭게 살아 있었고, 그럼으로써 생의 어느 순간보다 더욱 많이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그날, 처음으로 나는 생각했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이.(198)


버스에 탄 일행들은 어느새 말하기를 멈추고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인적 드문 주거지의 풍경을 침묵 속에 지켜보았다. 그 침묵 속에는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것,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알타이의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충만해져 있던 우리의 기분을 잿빛 현실로 돌려놓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감탄했던 유목민의 삶과 이 도시 변두리의 삶 사이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를 문득 깨닫게 하는 싸늘하고 무거운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에 대한 생각이었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는 거의 가지지 않은 유목민의 특징은 비교하지 않는 가난이었다. 나는 그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중략) 나는 자연의 혹독함과 기후 변동이 유목민들의 삶을 너무나 피폐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모두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도시 변두리로 몰려와 구멍난 옷을 의식하며 살게 되는 날이 결코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 소망이 헛된 것임을 잘 알고는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태란 없을 것이며, 또한 그 변화의 속도가 무섭게 빨라지는 시대를 우리는 직접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 알타이에서 갈잔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투바 유목민은 오늘 존재할 뿐이다. 다음 세대에 우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평선 아래로 저물어가는 민족이다. 보아라, 저기 태양이 진다.”(209~211)


그해 가을, 나는 베를린에 있으면서 인근의 하벨 강변에 사는 프란츠를 방문하게 된다. 그때 나는 프란츠의 아내인 칼 리가 구멍이 뚫린 티셔츠를 입고 우리를 맞는 것을 보았다. 그 티셔츠의 구멍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나에게 알타이의 기억을 회상시켰으며,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것 같았다.

칼리는 네팔에서 왔다.

왜 나는 구멍이 있는 옷을 입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왔는지, 왜 남에게 흉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왜 흉하게 보이는 것이 심지어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인상을 주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왜 구멍이 있는 옷은 흉하게 보이는 것이고 구멍 모양의 장식이나 무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나에게 가장 최초로 그런 계율을 주입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나의 정신은 이렇듯 오직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만 구성되었는데, 나 자신은 지금껏 그 사실을 모르면서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인지, 칼리의 티셔츠 구멍은 내 눈앞에서 점점 더 크고 또렷하게 인식이 되면서, 내 안에서 나를 차지하고 있는 텅 빈 공간의 존재를 각인시켜주었다. 도시의 삶, 혹은 문명, 그 모든 도그마가 형성해놓은 구멍.(211)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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