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곳을 스스로 만들기 <마음을 연결하는 집>
우리가 지닌 ‘집’에 대한 상상력은 오랫동안 아파트 분양 광고 수준에 머물러 왔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내가 살 수 있는 경제력(과 신분)을 증명했고, 거래 가치를 결정하는 조건들-브랜드 유무 및 단지 규모, 지하철역과의 거리, 누구에게나 적당한 일반적(개성 없는) 구조와 편의시설, 그리고 사생활 보장과 보안!-에 의해 규정되고, 비교되었죠.
당연하게도 아파트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해 아파트 단지를 고향처럼 느끼는 ‘아파트 키즈’ 세대가 성인이 된 지금은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사실상 아파트에 살 수 없는 처지임에도 ‘집’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다양하지 못합니다. 그건 아마도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담길 삶의 방식, ‘주거’의 개념, 경제와 이웃에 대한 생각 등등이 그렇게 다양하게 확장되거나 실험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일자리는 불안해지고, 기존 소비사회의 한계가 드러나고, 사람들은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 평생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이런 사회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책상에서만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일 겁니다. 만약 이런 고민을 ‘집’과 주거 방식의 차원에서 해결해본다면 어떨까요? 이것이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이 제안하는 ‘지역사회권’의 출발점입니다.
야마모토 리켄은 “하나의 주택에 하나의 가족이 생활한다”는 ‘원칙’을 토대로 지어져 공급되어온 집들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지적하면서, 가족 대신 연결되어 생활하는 사람들 전체의 상호 관계를 중심에 놓고 집과 지역사회를 다시 짓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거 공간들은 일종의 집합적 ‘유닛’으로 설계되며, 거주자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규모만큼의 유닛들을 빌려 생활하게 됩니다. 개인 공간과 개인 공간 사이에는 공용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며, 개인 공간의 일부는 공용 공간을 향해 개방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 공간에서 반상회에서부터 벼룩시장, 방과 후 교실이나 팝업 공방 등의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태양열 전지 등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시설을 포함하고 있어, 거주자들이 에너지 소비를 함께 관리하게 됩니다.
이런 환경을 무대 삼아 상부상조 시스템이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 건축가의 생각입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여러 이점들 중 가장 솔깃한 것은 바로 ‘지역 내 일자리’입니다. 정년퇴직을 한 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은퇴자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살려 공용 공간에서 창업을 해보거나, 옆 유닛에 사는 더 나이 많은 노인들을 돌보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정규직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재능과 기술이 있다면 지역 사회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일거리들을 기획해 실행해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야마모토 리켄이 꿈이 소상히 그려져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꿈에 가깝지만, 그 계획이 실현된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다 보면, 아파트라는 유령과 원룸의 현실에서 뛰어나와 모두가 함께 이런 꿈을 꾸면서 다르게 사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싶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민간주택업자가 취급하는 맨션이나 분양주택뿐 아니라 공공집합주택 역시 사생활과 보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공공집합주택에서부터 그 철칙은 시작되었다. 사생활 보호의 중요성은 공영주택이나 공단주택처럼 전후 부흥주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민간주택업자가 공급하는 분양주택은 단순히 그 현상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전후에 세워진 부흥주택은 ‘하나의 주택에 하나의 가족이 생활한다’는 주거환경을 유일한 모델로 삼아 공급되었다. 이른바 ‘1가구 1주택’이다. 우리는 그런 주택생활을 통해 사생활과 보안이라는 개념에 관해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교육’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건축이라는 상자를 통해 그 사용방법을 머릿속에 각인시켜온 것이다. 그리고 주택 자체가 하나의 환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즉 당연한 것처럼 한 장소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생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주택 외부로부터의 사생활과 내부의 사생활, 즉 부부와 자녀 각각의 사생활이 그것이다. 우리가 ‘2DK(Dining Kitchen)'라고 표현하는 주택형식이 그러하다. 외부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철문을 경계로 밀실 형태의 내부를 확보한다. 내부에는 두 개의 방, 즉 부부침실과 자녀의 방을 확보한다. 부부침실의 사생활은 전후 인구 증가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이런 공단주택이나 공공주택이 대량으로 공급되고 그 주택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그전까지는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빠른 속도로 침투했다. 그리고 그렇게 침투한 사생활에 대한 의식은 그 뒤로 이어진 고도성장기와 민간주택업자가 주도한 주택 대량 공급에 큰 공헌을 했다. 주택 내부의 사생활을 소중하게 여기는 주택은 외부와의 관계가 점점 희박해지고 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즉 외부와 차단된 패키지 같은 주택이 되는 것이다.(20~22)
그래서 지역사회권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고 싶다. 지역사회권은 1가구1주택 시스템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방식의 제안이다.
1 ‘1가구 1주택’이 표준가족을 전제로 공급되는 것이라면 ‘지역사회권’은 반드시 가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2 ‘1가구 1주택’이 사생활과 보안을 중심원칙으로 공급되는 데 반해 ‘지역사회권’에서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전체의 상호관계를 중심원리로 삼는다.
3 ‘1가구 1주택’이 주변환경, 주변지역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성립된다면 ‘지역사회권’은 주변환경과 함께 계획된다.
4 ‘1가구 1주택’은 궁극적인 소비단위다. 그것을 전제로 국가적인 성장경제전략이 성립된다. ‘지역사회권’은 단순한 소비단위가 아니다. 지역 내부에서 작은 경제권이 성립될 수 있게 계획한다.
5 ‘1가구 1주택’에 공급되는 에너지는 모두 외부로부터 온다. 따라서 주택은 단순히 에너지소비단위에 해당한다. ‘지역사회권’은 그곳에서 에너지를 생산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따라서 단순한 소비단위가 아니다.
6 교통기반시설은 ‘1가구 1주택’을 전제로 삼는다. 공공교통이나 자가용이 그것이다. ‘지역사회권’에서는 그 중간적인 교통기반시설을 구축한다.(26~27)
지역 내 일자리를 발전시키는 형태로서 또 하나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바로 ‘프로젝트에 따라 모여 살기’다. 지역사회권 안에 몇 개의 프로젝트를 만들고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이주해온다는 아이디어다.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쓰루미와 칸나이에서 각각의 프로젝트를 내걸었다. 쓰루미에서는 공원과 국제학교, 칸나이에서는 체육관과 창업을 제안했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시간을 들이면서 즐겁게 참가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들은 지역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참가할 수 있고 이익도 발생한다. 프로젝트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이주해온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쓰루미의 ‘공원’ 프로젝트는 자연을 가꾸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텃밭에서 야채를 재배하거나 초목을 키우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산책을 하면서 가볍게 둘러볼 수 있는 그공원을 만드는 등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최근 곳곳에서 텃밭을 빌려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 야채를 재배하거나 에디블랜드스케이프(Edible Landscape, 식용이 가능한 경관)라고 불리는 환경조성 관련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역사회권에서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주택에 녹지를 경유시켜 통풍이 잘 되게 상쾌한 환경을 만드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녹지, 경관, 에코라는 주제를 연동해 사람들 각자의 즐거움이 주변에도 도움이 되는 도식을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집합주택 공급은 아무래도 입주자를 수입으로 생각하고 선별하기 때문에 주변과의 관계가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경제력과는 별도로 거주자가 이주해올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꽤 살 만한 주거지가 될 것이다.(1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