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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Jul 18. 2019

7월, 생활의 궁리란 참 멋지지 않은가

마음이 가난할 때 <진짜 공간>

고등학생 시절 살았던 곳은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동네가 으레 그렇듯, 할머니들은 주인 없는(아마도 시 소유의) 땅에 온갖 채소를 길렀고 곳곳에 기묘한 구조의 무허가 집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창 사춘기였던 저는 동네가 부끄러웠고, 집에 가기 싫었고, 언젠가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독립해 혼자 집을 구하면서도, 그 동네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찾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집집마다 큰 화분을 내놓고 꽃나무는 물론 상추며 고추며 토마토를 길러먹는 동네에 사는 편이 좋았습니다. 


제가, 저도 모르게 찾고 있었던 것은 일상의 흔적이었겠지요. 여봐란 듯 으리으리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의 필요를 알고 이리저리 궁리하며 주변을 힘닿는 데까지 가꾸어 보려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난 장소들이 저에게는 아무래도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낡은 집에 살아도 자투리땅에 화단을 가꿀 줄 아는 삶은 누추하지 않다고, 가난해도 시시하지 않게 살 수 있다고 저는 어느새 결심하고 있었나 봅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건축을 전공하면서 서양 건축사와 거장들의 ‘작품’만 주구장창 배우는 데 지루함을 느꼈던 저자는 “상대적으로 오래된 동네에 가면 왠지 신이 나서는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뛰듯이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자는 “건축가가 통제한 조형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때그때 필요해서 직접 덧붙인 공간과 장치들”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참 멋지지 않은가. 난 이런 취향의 사람이구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꿈틀거리며 함께 살아있는 듯한 이런 공간과 장치들을 저자는 ‘생활 건축’이라고 불러봅니다. 그리고 건축사에서는 다뤄진 적 없었던 이 깨알 같은 곳곳들을 채집합니다. 저자의 채집망에는  물리적인 건축뿐 아니라 이를 이루고 있는 삶의 속살까지 걸려듭니다. 매끄럽고 화려하며 단정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며 개구지고 짠내 비린내가 뒤섞인 이런 풍경이 진짜 진짜이지 않냐고 묻는 책입니다.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처음 ‘경작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그게 어찌 본능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건 정말 본능이구나 싶다. 해 드는 곳에 틈만 있으면 어김없이 텃밭 상자나 화분이 자리를 잡고 있고, 빈 자투리땅에는 뭐라도 심어 키운다. 이웃집 옥상은 화분을 일렬로 쫙 올려놔서 도대체 물 주고 가꾸는 일을 어떻게 할까 궁금증을 유발한다. 찬찬히 관찰하다 보면 경작을 왜 본능이라고 하는지 확 감이 올 거다. 신기하게도 내가 키우는 고추는 비실비실한데 옆집 할머니가 키우는 고추는 어쩜 그렇게 건강하게 쑥쑥 자라는지 키가 3배는 되는 듯하다.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텃밭에 틈틈이 아욱도 키우고 과꽃도 키우고, 다양하게 심어 기르며 땅 살림을 참 잘 꾸려가신다.(207)     


길가에 의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생김새도 제각각이고 어디 한 군데 망가진 것도 있는데 옹기종기 동네 어르신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나는 사람 간섭도 한다. 누가 쉼터로 계획한 것도 아닌데 앉아 있기 좋은 곳에 자연스럽게 의자가 모이고 사람이 모인다. 우리 동네 마트 옆에는 전봇대와 벽 사이를 막아서 물건을 보관하고 구두와 우산을 수선해주는 분이 있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일해왔기 때문인지 단골이 모이고 친구들이 모인다. 도시계획가들은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장소를 계획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다른 곳에 더 잘 모이는 것 같다. 울퉁불퉁 찌글찌글한 곳에선 은근슬쩍 뭔가를 만들기 쉽다. 매끈하고 번쩍번쩍 광이 나는 장소에서는 이런 행위들이 일어나기 힘들다. 숨바꼭질할 때 꼬불꼬불한 골목길이나 움푹 팬 곳은 숨기 좋지만, 직선 복도에선 어디 숨을 데가 없듯이 말이다.(299)


문을 열면 낭떠러지다. 계단이 있는데 문이 없다. 가끔 길을 가다가 눈길을 끄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이없는 구조물을 발견할 때가 있다. 딱히 어떤 말을 갖다 붙여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을 일본에서는 ‘토마손’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재일 교포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 외국에서 데려온 용병 야구 선수 토마손(토머슨)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그는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벤치에만 앉아 있었다는 조금은 슬픈 일화가 있는데, 엄연히 존재하지만 무용지물인 것을 희화해 토마손이라 부른 것이다.(389)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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