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팀에서 쫓겨난 뒤로
두 번째 회사 : 광고회사 B사(2)
B사에 대한 환상은 언제부터 깨졌을까. 아마 3팀으로 강제 이동 당한 뒤, 와장창 깨지지 않았나 싶다.
아, 그렇다고 해서 오해는 말기를. 3팀에서의 생활을 뜻밖에 괜찮았으니까. 그저 2팀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자괴와 불안이 모든 걸 압도할 만큼 컸을 뿐이다.
그토록 2팀에서 내내 들어왔던, 내 아이디어는 최악이란 평은 희한하게 3팀에서는 잘 듣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낸 아이디어가 좋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갑자기 달라진 평가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말해 의구심밖에 들지 않았다.
얼마 안 지나 3팀을 나가게 되었다. 또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예정대로 2개월이 지났으니 다른 팀으로 소속을 옮긴 것뿐이었다. 2팀에서 타팀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예외적으로 나를 내보냈던 경우이므로 3팀에서의 근무 기간이 2주 정도로 심히 짧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1팀, 2팀, 3팀, 이렇게 총 세 팀을 돌아다니면서 어찌어찌 2개월이란 시간을 채웠다.
내가 다음으로 가게 된 팀은 제작 4팀이었다. 4팀은 적은 인원수를 가진 팀이었으며 동시에 인턴들 사이에서 유명한 팀이기도 했다. 4팀의 나 CD님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섭기로 유명했다. 지금까지 그의 밑에 있던 인턴들 대부분이 울음을 터트렸고, 그래서 인턴들이 제일 기피하는 1순위가 나 CD님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그냥 해탈했다. 4팀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3팀의 사람들이 나보고 고생이 많겠다며 힘내라는 위로를 전할 정도였다. 2팀보다도 더한 인턴 생활이 시작되리란 건 불 보듯이 뻔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나 CD님 밑에서 눈물 쏟을 일은 없었다. 물론 그는 소문대로 깐깐한 사람이었다. 심심한 아이디어를 가져가면 진부하다며 가차 없이 쏘아붙였고, 업무와 별 상관없는 사소한 실수에도 너그럽게 넘기기보다 반드시 한 번은 걸고 넘어갔다. 그렇지만 나 CD님은 2팀의 가 CD님처럼 도중에 발표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좋든 나쁘든 끝까지 경청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끔이긴 하나 나 CD님의 입에서 내 아이디어가 좋다는 평가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발표가 멈춰지지도 않고, 그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칭찬까지 해주니 의구심밖에 들지 않았던 마음에는 차차 다른 감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희망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력이 향상한 걸지도 모르겠단 희망 말이다. 2팀에 있을 때보다 쓸모가 생긴 기분이었다. 이번엔 <미운 인턴 새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하차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등은 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전보다 등허리를 펴고 회사에 다닐 수 있었다.
4팀에서의 인턴 생활은 2팀 때만큼 암울하지 않았지만, 마냥 여유롭고 즐겁게 보냈단 건 절대 아니다. 4팀의 업무량은 그 어느 팀보다 월등히 많았다. 팀 구성원이 적어서 인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촬영, 재 PT 등 여러 이슈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바람에 업무가 몰리게 됐다.
때문에 나날이 야근했다. 아이데이션 회의도 매일 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날마다 쥐어짜야 했고, 그럼에도 연이은 야근으로 인해 깊게 사고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처했단 소리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피로함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잠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적게 자고, 골이 지끈거릴 때까지 많이 생각하고,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입시를 치른 고3 때도, 졸업반인 대학교 4학년 때도 이렇게 치열한 일상을 보내지 못했던 것 같다.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썩어가고 있었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이런 표현만이 떠오를 정도로 눈그늘이 눈가 밑으로 진하게 내려와 있었다.
어떻게 썩었는지를 더 표현하자면 피부는 푸석푸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잦은 야근으로 인해 원래도 민감했던 피부가 더 민감해진 탓이었다. 새벽녘까지 회사에 있는 날에는 입술이 부어오르고 볼 부근이 벌겋게 일어나곤 했다. 그런 꼴을 목도할 때마다 다 때려치우고 싶단 충동이 솟구쳤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감도 함께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반발심은 꾹꾹 안으로 삼켰다. 당장 B사의 인턴을 그만둘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 까닭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광고 레퍼런스 하나라도 더 보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을 비우고 그저 열심히만 했다. 사실 ‘열심히’라기보다 ‘필사적’인 느낌이 더 강하리라. 물속에 잠기지 않으려고, 숨 좀 쉬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사람처럼 B사를 다녔다. 난 더 이상 혼나기 싫었다. 모두가 미워하는 인턴이 다시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노력과는 별개로 내 잔 실수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피로로 찌든 머리는 더 좋은 아이디어를 뽑아내지 못했고 맥락에서 빗나간 생각만을 가져왔다. 회의 시간에 듣는 비판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손도 맛이 가 있었다. 원래도 느린 작업 속도가 점차 더뎌지기 시작했다. 간단한 작업인데도 빨리하려고 서두르다 보니 자잘한 실수를 일으켰다. 그걸 수습하기 위해 고치다 보면 속도가 또 느려졌다. 얼른 해야 한다는 강박에 마음은 급해지고 그럼 다시 실수가 나오는, 그런 악순환을 나는 자주 돌고 돌았다.
그 날도 그러했다. 제안서에 넣을 시안을 여러 개 작업해야 하는 날이었다.
마감기한은 다음날까지였다. 작업 개수를 생각하면 조금 빠듯한 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업무시간 내내 붙잡으며 열심히 했지만, 나온 결과물이 썩 좋지 못했다. 미진한 작업 속도와 비효율적인 작업 과정을 끝내 개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퇴근 전까지 6개를 작업하기로 했는데 7시가 다 되어가서도 3개만을 겨우 완성하게 되었다.
당연히 야단을 맞았다. 나는 고개 숙여, 4팀 사람들 중에서 내 사수 역할을 했던 ‘바’에게 연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나... 진짜 너 같은 인턴 처음이야.”
뒤이어 바 사수님은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그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지만, 나에 대한 실망을 금치 않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 감정을 여실히 담아냈다.
사무실 안은 유난히 적막했다.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를 받는 이 한 명 없었다. 외근을 나간 사람도 없는 모양인지 비어 있는 자리도 평소보다 적었다. 그래서 내가 바 사수님에게 혼나는 순간을 내 인턴 동기들을 포함한 많은 B사의 직원들이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