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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진우 Apr 06. 2020

3_그래서 수술이 안 된다고요?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 졌다

두 번째 이야기 2_내 뇌에서 2.7cm 종양이 보인다


MRI사진을 찍고 나서 곧바로 대학병원 예약을 걸었지만, 대기 기간이 꽤 길었다. 한 달이란 긴 기다림 끝에 대학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진찰받는다는 기쁨도 느낄 새 없이,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됐다.


"종양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서, 수술 못해요. 잘못 건드리면 안 되거든요. 우선 약이 잘 듣기를 기도해보죠."


와우. 도 모르게 입을 떡-벌렸다. 한 달을 기다리면서 나름 여러 가지 내용을 상상했지만 이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 충격에 잠시 만히 있었더니, 교수님은 뇌하수체 종양은 어차피 약이 잘 듣는 질병이니 걱정할 필요 없단 말씀 덧붙여 주셨다. 하지만 긍정적인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위치가 안 좋다고? 그래서 수술이 안된다고?'란 생각만 도돌이표처럼 돌아다녔다. 


약을 처방받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당시에는 회사 재직 중이었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에 연락이 끊긴 한 친구를 떠올렸다. 꽤 친한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뜸해지면서 한 5~6년은 교류가 끊겼던 그 친구. 갑작스레 그녀에게 연락하고 싶어 졌다. 연락 끊긴 사이에, 외국에 있거나 번호를 바꾸거나 또는 나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앞으로 조금은 다르게 살고 싶단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냥 평소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고 싶어 졌다. 약간의 어색함과 한 움큼의 용기를 담아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지?"



이렇게 시작한 돌발행동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원래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은 어렵지 않은 법이다. 고등학교 친구뿐 아니라 대학교 친구들에게도 오랜만에 연락하고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원래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쑥스러움 많은 성격인데도, 만나서 놀자며 치근덕거렸다. 부끄러움을 잠시 잊고, 그들에게 '보고 싶다'란 낯간지러운 말을 꺼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평소 입지 않은 패션을 시도해보았다. 예를 들어 고교 졸업 이후로 치마와 인연을 끊었었는데, 이참에 스커트를 구매해봤다. 너무 오랜만의 재회인지라,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 나가는 날에는 어색함에 이리저리 모습을 훑어보며 걸어 다녔다. 치마 스타일이 나와 솔직히 어울리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소소하지만 확실히 새로워 느낌이랄까.


최근 서점에서 구매한 책들

종종 서점에 들리는 취미도 새로 생겼다. 읽다가 가끔 마음에 들면 사기도 했다. 아무리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라 불린다 해도, 그동안 내게 있어 돈과 시간을 쏟을만한 양식은 밥뿐이었다. 피곤할 때는 커피였고. 어쨌든 유일한 양식은 '음식'이었던 내가 책을 조금 가까이 두게 됐다.


또한, 나는 내 감정에 꽤 솔직해지기도 했다. 얼마 전의 프리랜서 제의에 내 기분에 맞춰 거절하거나, (참고 글 : 인턴이야기(2)) 브런치를 새로 개설해 가감 없이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물론 익명의 힘을 빌려 겨우 쓰고 있긴 하지만.



이런 모든 돌발행동이 솔직히 말해, 모두 좋은 결과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구매했던 겨울용 치마는 하도 입질 않아서, 아까운 마음에 봄이 된 지금까지도 입고 다닐 정도이다. 또한, 오랜만에 대학 동기에게 밥 한번 먹자고 권해도, 쉽사리 만남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독서 역시 읽다 말다 하고 있는 중이다.


'어라, 일상을 새롭게 보내기 이미 너무 늦었나. 역시 사람은 살았던 대로 살아야 하나?'

돌발행동의 한 절반쯤은 성공하고 또 한 절반쯤은 소득이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즐겁다. 소소한 버전의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이뤄가는 느낌인지라.


'내일은 운동을 시작해볼까? 마라톤을 나가볼까?'

평소라면 전혀 생각하지 못할 일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꽤 즐겁다. 비록 운동을 시작하다가 또 적성에 안 맞거나 도중에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일에만 치여 살고, 그 외의 시간은 매번 무의미하게 보내던 내가 먼저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마라톤 대회 일정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름 수확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마인드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주말, 카톡 알람이 울렸다.


"잘 지내지? 나도 보고 싶다. 언제 시간 돼? 시간 되는 날에 보자."


교류가 끊긴 친구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친구의 문자에 답하면서, 내가 원했던 새로운 일상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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