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졸라서 골프공만 한 새끼 거북이를 데려왔더랬다. 엄마는 결국에 본인이 그 동물을 책임질 것을 알았으나 강아지일 뻔했던 것이 강아지가 아닌 거북이라는 점에서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작은 몸집이었지만 있을 게 다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작은 발에 끝도 제법 나누어져 가락처럼 보였다. 물론 까만 눈도 있었다. 분명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한 눈이었다. 우리는 거북이에게 각자의 모습을 들이밀며 과연 거북이가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면 아는 것도 같았고 모르는 것도 같았다. 그때는, 아니 지금도 인간의 방식으로밖에는 존재를 나눌 줄 모른다. 서로를 알아차리고, 부르면 대답하고, 가끔 나를 찾기도 해야만 관계를 맺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까만 눈동자가 예뻐 보일수록 거기엔 딱히 내가 없다는 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새끼 거북이 이름은 간단하게 '북이'었다. 북이는 처음엔 세숫대야에, 조금 크고 나선 투명하고 커다란 김치통에 살게 되었다. 어느 날 북이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미묘한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거북이는 아주 깊고 너른 곳에서 마음껏 수영해야 하고, 온도도 정확하고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숨을 수 있는 곳, 물 밖에서 몸을 말릴 수 있는 곳도 있어야 하며, 물의 산소농도도 산성도도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북이를 거실에서 매일 보고 싶다면, 북이가 살았어야 하는 그 지구를 마땅히 거실에 그대로 옮겨놓아야 할 따름이었다. 나는 그 씁쓸한 절망감을 지금도 금방 다시 느낄 수 있을 만큼 생생히 기억한다. 책임지고 싶으면서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생각,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그런 마음 말이다.
어린 내 힘으로서는 커다란 수조도, 산소농도 조절기도, 좋은 자갈도 바위도 다 갖출 수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왜인지 온도 조절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단법석을 피우며 온도 조절기를 주문했는데, 온도 조절기가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없어 금방 고장 나고 말았다. 엄마는 북이가 얼마나 튼튼한지 모른다며 그런 것 없이도 이미 수해 잘 살았다고 했다. 아쿠아리움에서 제일 크고 제일 튼튼해 보이는 거북이가 우리 북이었기 때문에 데리고 왔다고 했다. 과연 북이는 이미 몇 해나 우리 집에서 쑥쑥 자란 뒤였다. 분명 따뜻한 곳에서 살기 때문에 온도 조절이 안 되면 치명적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를 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는 환경에 따른 북이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세심하게 보살펴주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비밀번호는 오랫동안 세 딸의 이름 마지막 글자에 '북이'까지의 조합이었다. 북이도 엄연히 엄마가 사랑하고 돌보는 자식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엄마는 북이가 우리 집에 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다. 거북이는 장수와 지혜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그런 북이가 이제 더 이상 우리 집에 없는 이유는 북이의 몸집이 내 손바닥만큼 커지면서 생겨난 엄마의 고민 때문이었다. 제일 큰 김치통도 너무 커져 버린 북이 에겐 아무래도 작기도 하고, 북이에게 북이의 지구를 돌려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엄마에게도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엄마가 뒷산에 있는 은하사에 올라갔다가 법당 앞 연못에서 북이랑 똑같이 생긴 거북이들이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 요가 자세로 일광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후로 엄마의 몇 해에 지난 고민은 서서히 결론으로 굳어져 갔다.
"그렇게 함부로 방생하면 죽어버린다던데"
"아니다. 엄마가 봐놓은 데가 있다. 북이 친구들이 행복하게 잘 살더라."
"북이 친구들 맞아? 다른 거북이(종) 아니야?"
"아니야 북이랑 똑같이 생겼어."
북이랑 똑같이 생긴 거북이들이, 그것도 정말 많은 거북이들이, 행복하게 수영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중에는 북이보다 더 작은 거북이도 더 큰 거북이도 있다는 말에 나는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야생종은 아니므로 북이랑 운명을 같이하는 거북이들이 이 집 저 집에서 머물렀다가 결국엔 여기로 오게 된 것이라면, 어느 나이에 도착했든 잘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은하사를 드나들며 유심히 거북이들에 대한 관찰을 끝낸 엄마의 고민은 더 이상 북이가 거기서 잘 살 수 있을까 아닐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랬던 엄마가 어느 날 북이를 보내주고 왔다고 했다. 은하사를 갈 때 북이를 잘 싸서(?) 데려다가 연못에다 풀어줬다고 했다. 처음엔 거북이지만 물에 빠질까 물 가까운 바위에 내려주었는데, 북아~ 하고 부르니 한 번 쳐다보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참을 안보이기에 헤엄을 못 쳐서 물에 빠져버렸나 걱정을 시켰지만, 곧 바위로 한 마리가 기어오르더라고, 걔가 북이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북이가 죽었을까 궁금했지만, 엄마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 금세 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절에 들렀을 때, 엄마는 잊지 않고 연못에서 북이를 찾았다. 누가 북이인지 알 수 없어 "북아~" 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북이를 불렀다. 그랬더니, 일광욕을 하고 있던 많은 거북이 중에 한 마리의 거북이가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려 엄마를 쳐다봤다. 다리 한쪽을 들고 요가 중인 채였다. 엄마는 걔가 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에이~ 거짓말 치지 마라! 하며 믿지 않았지만, 엄마는 아무렴 개의치 않았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우리 집에 오래 머물다간 북이. 우리 가족에게 가족이 되어준 북이가 이젠 깊고 넓은 물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