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사이보그의 아침

호놀룰루 마라톤, 나갈 수 있을까

by 원숭이마법사

새벽 5시.

알람이 울리고, 나는 나의 뇌와 몸을 어르고 달랜다. 10분만 더 자자는 합리화, 침대와 이불 속이 너무 포근하게 느껴지는 게으름과 만족감, 이렇게 포근하고 졸립고 행복한 에너지를 음료로 만들어 놓았다가 불면증에 시달릴 때 마시면 좋겠다는 상상, 누군가 에어컨을 켜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 이제 몇분쯤 지났을까하는 궁금증, 오늘 해야할 일 목록과 그 일을 실제 하고 있는 시뮬레이션 혹은 찰나의 꿈, 현실로 돌아와 지금 당장 일어나자는 외침과 각성.


그래, 더 생각하지말고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나는 생각이 차단된 기계다’라고 되뇌인다.

나는 기계다.


일단 발바닥을 지면에 접촉시킨다. 나는 기계니까, 지면에 발이 닿았으면 박차고 일어나, 다음 목적지-욕실까지 가는데 집중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20분.


욕실의 거울 속에서 좌우로 회오리치는 붕뜬 머리의 사내가 나를 반긴다. 웃어줄 여유는 없다. 나는 기계니까. 최대한 무표정으로 고양이처럼 얼굴에 물을 묻히고는, 양치를 시작한다. 회오리 머리의 사내도 기분이 상했는지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양치를 하고 있다.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 그도 나도 감정과 생각은 배제된, 다음 행동이 정해져 있는 기계니까.


양치를 마치고서는 거울 속 사내를 뒤로 하고, 욕실에서 나와 티셔츠와 반바지를 찾는다. 최대한 냄새 나지 않는 것으로. 세탁기 문제인지, 건조기 문제인지, 혹은 오래된 아파트의 수도의 문제인지 어떤 문제인지 정확히 몰라도-아니,사실 이유를 러프하게도 모르겠다- 빨래를 새로 한 운동복에서도 쉰내가 날 때가 있다. 식초도 넣어보고, 온수도 돌려보고, 베이킹 소다도 넣어보고 했지만, 그때 뿐이다. 두세벌의 티셔츠를 들고, 새로운 친구를 만난 강아치처럼 옷에 코를 갖다대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틱.톡.틱.톡. 시간은 흐른다. 아차, 나는 기계다! 생각과 판단을 멈추고 아무거나 일단 입는다. 티셔츠,반바지,양말을 잡히는 대로 찾아 입고는 대문으로 향한다. 문밖으로 나간다. 문밖으로 나간다. 이 기계는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목표다.


현관으로 가서 대문의 전자식 자물쇠의 동그란 열림 버튼 누른다. 표시창은 빨간색은 녹색으로 바뀐다. ‘문이 열렸습니다’는 기계음이 울리고, 대문의 자물쇠는 잠금에서 풀림 상태가 된다. 나는 기계로써 해야할 마지막 일, 현관문을 활짝 연다. 기계로써 할 일은 여기까지다.



현재시각 05:36.

평소보다 6분이 늦었다. 이제 나는 의식과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써 행동한다. 습하고 텁텁한 공기를 느끼고, 달리기 싫다는 생각도 해본다. 왜 달려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생각하는 동안에도 무의식의 다리는 나를 달리던 코스로 인도한다. 마치 김유신의 말이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 중에 향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인간이니까, 머리 속에서 타협을 시작한다. 오늘은 얼마나 뛸까, 힘드니까 1km만, 아니, 뛰는게 힘드니까 걸을까, 독이 온 몸에 퍼지듯 머릿 속에 생각이 모든 경우의 수를 펼쳐 놓는다. 머리속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럽다.


귓구멍에 에어팟을 꽂아넣는다. 주변의 소음들이 뮤트 상태로 노이즈 캔슬링된다. 서둘러 해독제를 찾는다. 오디오북 앱을 작동한다. 귀를 기울인다. 생각들이 사라져간다. 마치 주변의 소음이 노이즈캔슬링된 것처럼, 생각들도 사라져 간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걷지만 말자고. 욕심부리지 말고, 뛰고 싶은만큼만 뛰자고, 시계의 러닝 버튼을 누르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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