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역꾸역 나선다

D-94, 도전 5일째

by 원숭이마법사

오후 6시 30분.

나갈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에 달리러 나가기 위해

저녁도 5시쯤 미리 먹어두었다.

밀린 일을 뒤로하고 일찍 귀가했다.


여기까지 달리기를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된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부터 나가기 직전이 가장 어렵다.


나가기 한참 전부터 하는 '나가야지... 나가야지...' 되뇌는 것은 쉽다.

하지만 달리기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막상 닥친 현실이 되면서부터는

Comfort zone을 벗어나는 그 최후의 한 발짝이 고비인 것이다.


내가 가진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나무늘보식 해결 방법과 묻어두는 것.

오늘은 꾸역꾸역 묻어두는 방법이 효과적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과 기억에 대한 아련함이 있다.

붙잡고 싶은 과거일 수도 꺼내보면 고통스럽거나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감정들을 꺼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단단히 묻어두기로 한다.


항아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담는다. 무거운 무게추도 함께 넣는다.

그리고 나는 고도로 밀봉한 항아리를 안고, 보트를 타고 가능한 먼바다로 나간다.

육지가 보이지 않을 때쯤 항아리를 꺼내 바다에 담가본다.

찰랑이는 바다 물결이 항아리와 내 손을 규칙적으로 적신다.

어느 순간 나는 손에 힘을 뺀다.

그리고 새파란 물결 속으로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는 항아리가 보인다.

이내 항아리가 점이 되어 사라진다.

점이 되어 사라진 것인지, 심연의 바다에 가려 사라진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아주 깊은 곳으로 단단히 봉인된 것은 확실하다.

그렇게 기억은 묻힌다.



달리기를 위해 나가기 직전 발산되는 생각들을 나열하면 이렇다.

1. 10분만 더 쉬자.

2. 달라질 건 없잖아. 뉴스 요것만 마저 보고 나가자.

3. 소화가 덜 된 거 같은데 뛰면 배가 아플 거 같다. 30분만 더 있다 나가자.

4. 비가 더 올 거 같은데?

5. 이미 내린 비로 길이 물이 고여 있을 텐데, 러닝화는 한 켤레밖에 없는데?

6. 4일 뛰었으니 운동생리학적으로 하루 휴식이 더 도움이 된다. 쉬자.

7. 집이 엉망이다. 쉬면서 집정리가 훨씬 시간의 효용가치가 높을 거야.

8. 발목이랑 뒤꿈치가 좀 아픈 거 같지 않아? 다치면 2달은 쉬어야 해. 오늘 하루를 얻고 2달을 버릴래?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가 뻗어나가는 속도로 그럴듯한 이유들이 자란다.

나는 생각의 줄기를 잘라 항아리에 담고, 밀봉해 바다로 나가, 멀리 던진다.


그리고 생각을 할 수 없는 기계처럼 움직인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나는 일단 나간다.

나는 지금 뇌가 없다.

생각하지 않는다.


6시 50분이 되면, 조건과 환경을 고려해서, 달린다.

6시 50분이 되면, 나간다.


20240905_185959.jpg 길이 젖어있으면 어때. 피해서 걷거나 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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