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9
지루한 달리기를 하다 보면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게 되는데,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달리기 전의 작은 통증 때문에 달리기 싫을 때가 있다. 현재 나에게 느껴지는 통증은 대강 이렇다.
양쪽 무릎 아래.
오른쪽 발뒤꿈치와 오른쪽 엄지발가락.
다행인지 불행인지 10분 정도 달리면 사라진다. 이럴 땐 쉬어야 한다고 하는데 큰 부상으로 이어지면 부상 핑계로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달리라고 강요하는 상황도 아닌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들까.
1년 전인가 데이비드 고긴스의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통증을 참고 달렸던 적이 있다. 책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의 하드코어 버전 실화다. 다리가 완전히 고장 났음에도 덕트테이프라도 덕지덕지 발라가며 달리는 그의 이야기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날 나는 완전히 고긴스에 빙의해서 절뚝거리며 아픈 다리로 8km를 달렸다. 덕분에 짧은 성취감, 아주 긴 휴식이란 결과를 얻었다.
#2.
새벽 아침 일찍 달리는 아내의 러닝클럽 이름은 '눈떠지면 달리자'다. 나는 반대로 저녁에 달린다. 반항심이나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서 아니다. 그저 늘어져 있기 쉬운 저녁에 달리고 나면, 달리고 난 이후 1-2시간 정도는 각성된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내가 러닝클럽을 만든다면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생각했다. '눈떠지면 달리자'에 라임을 살려 '눈감기 전 달리자'.
눈감기 전 달리자... 왠지 건강 캠페인이나 생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같은 비장함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러닝클럽의 이름치곤 무겁다. 그럼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 '먹었으면 달리자'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먹었으면 늘어지지 말고 달리자.
#3.
러닝 인구가 급속도로 늘었다. 내가 직접 달린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아내의 사진을 찍느라 몇 년 전부터 마라톤 대회나 러닝코스를 자주 갔기 때문에 확실히 체감되는 부분이다.(가끔은 좁은 길에서 비켜 달리고 피해 달리는 것이 살짝 짜증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떼 지어 달리는 그룹이 늘었고, 연령대가 상당히 낮아진 느낌이다,라고 쓰고 보니, 러닝인구의 연령대가 어려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나이를 먹은 것일 수도 있겠다.(예전엔 군인아저씨였는데, 지금은 군복 입은 기특한 학생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다.)
#4.
확실히 2024년 여름은 절정을 찍었음을 알 수 있다. 달리는 풍경 속에서 초록 빛깔의 팽창과 성장이 주춤해졌다. 이제는 새치처럼 드문드문 노란 빛깔의 잎사귀들이 보인다. 풀벌레 울음소리도 다양해지고 한층 진해졌다.
유난히도 덥고 습했던 여름이었다. 지난 토요일엔 무언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 몇 장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