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기를 쓰려 결심하고 매해 연말마다 다이어리를 산 지 어언 25년이 넘어갑니다. 이제 아이도 서른을 넘겼으니 그 햇수만 놓고 보면 나란 사람도 참 어지간합니다. 하지만 햇수만 오래되었지, 내용만 놓고 보면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것도 딱히 없습니다. 그냥 무슨 일이 있었다. 별일 없다. 정도의 수준입니다. 아마도 몇 년 분을 모아 놨다 하더라도 감탄사를 들을 만한 내용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정도로 밋밋합니다.
언제라고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이것이 무슨 짓인가?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사춘기요, 권태기요 침체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냥 하루하루 있던 일만 적을 요량이면 말끔하게 발행된 다이어리가 무슨 호사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어느 순간 몇 년을 그렇게 허송하며 보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내용은 내게 아무런 쓸모없는 메모에 불과했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자고(自古)로 일기란 난중일기(亂中日記)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제 SNS에 슬쩍 많은 이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래도 쓸까요? 나의 소감, 느낌, 이런저런 생각의 나열도 없이 그냥 보고서 작성하듯 적는 것도 내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데 줄줄이 달린 답글은 내가 생각해도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당장 시작하자는 답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호응에 사뭇 경건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일기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중에 다시 읽는다는 가정하에, 단순히 사건을 나열한다고 할지라도 해가 지나고 상당 기간이 지난 후의 소감은 확연히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졌습니다. 아니면 내 형편이 달라지고 주변 상황이 달라졌을 때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때와는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순간 아무 의미 없다! 생각하고 버렸던 일기장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저 두세 권의 과년(過年) 일기장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충신(忠臣)에게 남은 12척의 배에도 못 미치는 미미한 수입니다.
내 마음이 변덕스러워 그나마 남은 과년(過年)의 일기장도 향후 어떤 운명을 맞을지 나도 모를 일입니다. 그날 이후로 별 볼 일 없는 내용만 남은 일기장이라 할지라도 잘 남겨 보자고 결심은 했지만 죽 끓듯 변하는 내 마음을 지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습작의 도구라도 될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을 갈무리해 주는 도구라도 될 수 있을까! 싶어서 고이 놔두는 중입니다. 때로는 부끄러운 과거도 자랑하고 싶은 과거도 고스란히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혹 쓰고 계신다면 어떤 방편을 이용하고 계시는지요? 이 습관과 결심이 늙어서도 지속된다면 아마도 힘이 될 때까지 펜도 굴리고 자판도 놀리겠지만, 건너 건너 들은 한 청년처럼 사지를 못 쓰는 병을 가지고도 구술(口述)하면 보호자가 받아 적고 때로는 녹음하면 또 옮겨 적는 번거로움도 열정으로 알고 지내는 분을 보며 내 안의 존경심을 넘어 내게도 그런 열정이 있는지 확인하는 중입니다.
부디 식지 않는 불꽃이라도 되어 겉으로는 사그라들어 보일지라도 입김 한 줌으로 다시 살아나는 그런 불꽃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