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몰래 공유한 추억
사뭇 사춘기라고 칭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무런 반항 불퉁거림 하나 없이 몸만 어른이었던 중3 시절을 계절로 표현하라고 치면, 잔뜩 찌푸린 데다가 하늘을 찌르면 금방이라도 얼음조각이나 눈발이 흩날릴 거 같은 초겨울 흐린 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 중2 시절, 금쪽같던 막내아들을 하늘로 먼저 보낸 부모님의 얼굴에는 그다지 웃음기도 없었을 뿐 아니라 큰아들마저 사춘기라는 이유로 엇나갔다가는 어떤 형국을 맞을지 생각하기도 싫은 나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그것이 점잖은 사춘기를 보낸 결정적 이유라고 보기에는 어설퍼도 너무 어설픈 핑계쯤 되겠지만 집안의 암울한 구름이 걷히기까지 그 후로도 몇 년이 더 걸렸습니다.
중3의 대부분은 군대에서 갓 제대한 다섯째 외삼촌과 함께였습니다. 12남매 중 7.8명이 그대로 눌러앉은 외갓집에 삼촌이 들어갈 여유는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조카의 공부라도 봐주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삼촌은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숙식을 같이했습니다. 명색이 영문과 학생이었지만 삼촌은 복학할 생각일랑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간 군대이니 남은 2년만 마치면 되련만, 고등학교 시절 서울대에는 걸어 들어간다고 할 수재에게 지방대 영문과는 어떻게 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지요.
그렇다고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거나 우울감에 젖어 사는 그런 부류는 또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푼수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시끄럽고 밝은 성정을 유지했습니다. 12남매 중 11번째인 삼촌은 모든 조카 중 첫째인 나랑 12살 차이를 극복하며 그렇게 잘 지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방바닥 한쪽에 항공우편 봉투가 놓여있었습니다. 당시 펜팔을 하고 있었기에 내 것인가 싶어 들어보니 봉투에는 삼촌 이름이 쓰여있고 주소는 서독(West Germany)으로 적혀있었습니다. 아마 삼촌의 선배인 듯한데 답장을 쓰다 만 편지에는 연신 형(兄)이라는 호칭이 자주 널려 있었지요. 결국 왜 그리 멀리 갔냐? 보고 싶은데 올 계획은 없냐?라는 내용 끝에는 보고 싶은 마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말이 그렇지 외국 여행도 어렵고 이민도 쉽지 않은 시절, 서독은 멀어도 너무 먼 나라임은 분명했습니다.
동봉한 사진에는 선배의 커플 사진이 들어있었습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독일의 가을은 빨강, 노랑의 색들이 어찌 그리도 예쁜지! 활짝 웃으며 찍은 그분들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삼촌이 찡찡대며 보고 싶다고 할 만했습니다. 또 하나 알게 된 게 있다면 아그파(Agfa)라는 필름회사가 독일 회사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 후로 필름을 살 때마다 저는 되도록 코닥이나 아그파를 찾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촌은 그 후로 그 선배 형님을 만나기나 했을까? 지금은 무얼 하며 살고 계실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것이 내가 궁금해할 일은 아니지만 잠시 그 편지를 슬쩍 보았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이겠습니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고 손주까지 보실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제 기억에는 사진 속 그대로 풋풋한 젊은이의 느낌과 잔영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간과 기억은 아련한 추억을 남긴 채 이렇게 흘러갑니다. 수많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세상을 편하게 하는 흐름 뒤에는 이렇게 옛 기억들이 면면히 당겨져 옵니다. 결국 그것들은 어느 바다에 저장될까요? 이들을 기억하는 구세대(舊世代)가 명멸하면 어느 시점까지의 기억이 추억으로 남을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