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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광환 Jul 31. 2020

현대물리학으로 바라본 불교사상

양자역학과 불교사상의 공통적 개념에 대하여

붓다가 입멸한 후, 지금까지 불교사상은 공허한 이야기로 치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너무도 맞지 않는 개념을 나열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서양철학과 그 개념에 물들어 있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사물의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이라는 이중성의 존재에 대한 개념을 말 할 때, 우리는 머리부터 아파옵니다.

하지만 현대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런 개념은 어느 때부턴가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특히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겐 이미 진리가 되었지요. 이렇듯, 2500년 전에 설파했던 붓다의 진리가 이젠 과학의 진리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설명이며, 현대물리학과 불교사상의 공통점, 그리고 그 이해에 대한 글입니다.  




양자역학 코펜하겐 해석의 중심인물들

  

사건중심의 세계관

세상엔 많은 것이 존재합니다. 자연과 사물, 동물과 식물 등 다양하죠.

우리는 세상의 ‘존재’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걸 의심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존재중심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전통적 불교에서는 ‘어떤 존재’라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된 개념’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우리는 갑자기 이해하기는 어렵지요. 특히 서양인들은 윤회개념이나 공(空)의 개념, 무아(無我)의 개념 등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죠. 그런데 최근 들어 불교식의 ‘존재’ 개념을 서양 과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스몰린이라는 물리학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물이 있다. 먼저 돌멩이나 깡통처럼 그 성질만 나열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과정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나 문화 같은 존재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들이다.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어떤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서서히 변하는 것과 빨리 변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주에는 물체와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빠른 과정과 느린 과정이 있을 뿐이다.

우주가 물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환상은 고전역학을 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의 양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론과 양자론은 우리 우주가 과정들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운동과 변화가 주된 것이다. 근사적이고 임시적인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 어떤 고정된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환상이다. 우주는 많은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사건은 과정의 가장 작은 부분 또는 변화의 가장 작은 단위로 구성될 수 있다. 사건들의 우주는 관계론적인 우주다. 모든 성질은 사건들 사이의 관련성을 통해서 기술된다. 두 사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과관계다.” 


[리 스몰린, (1955~ ), 미국의 이론물리학자로, 페리미터 연구소의 연구원이며 워털루 대학교의 비상근 교수이다. 스몰린은 양자 중력을 향한 여러 접근법을 개발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저서《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Three Roads to Quantum Gravity). 사이언스 북스, 2001년.] 


세상일은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이 없지요. 한 사건의 원인으로 다음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건이 인과관계를 맺고 일정 동안 진행될 때, 이 사건들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의 흐름’을 보면서 무언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이 ‘사건의 흐름’이 바로 스몰린이 말한 ‘과정’입니다. 즉, 세상엔 사건만 있고 존재가 없다는 뜻이지요.

이런 관점을 ‘사건중심의 세계관’이라고 하는 데, 이것은 불교철학의 핵심인 ‘연기법’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과정으로서의 자아, 無我論

무상(無常)이나 무아(無我) 또는 공(空)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무아와 공을 말하는 것은 세상 어느 것에도 실체(實體)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일 뿐,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 또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개체적 성질을 말하지요.


연기법에 의하면 세상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정신이든 물체든 실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이런 의문은 우리뿐만 아니라 붓다의 제자인 챤나(붓다가 왕자시절 마부출신)도 가졌습니다. 그가 물었어요.


“일체에 실체가 없고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내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현대물리학자인 스몰린이 바로 앞에서 말해준 겁니다. 

이렇듯 세상은 사건과 과정으로 이루어졌을 뿐, 거기에 ‘어떤것’이란 없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아’ 또는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죠. 결국 사건중심으로 인간을 기술하면 무아론(無我論)이 됩니다.


알기 쉽게 내 자신의 무아(無我)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0년 전과 오늘의 나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매년 90%씩 바뀌는데, 10년 후면 모두 바뀌는 거죠. 결국 나를 구성하는 세포, 원자들은 10년 전과 다른 것들입니다. 게다가 10년이면 인지능력과 성격, 사고방식도 바뀝니다. 그런데도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나’는 ‘나’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10년 전의 ‘나’가 원인이 되어 오늘의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물의 구성요소를 오온(五蘊)이라고 부릅니다.

온(蘊)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1. 쌓다. 2. 저축하다. 3. 간직하다, 감추다. 4. 속내(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마음이나 일의 내막). 5. 품다. 내포하다. 포함하다. 함유하다. 5. 심오한 내용. 의미가 깊은 사상(말). 심원한 문제(이론). 깊은 속 등의 의미를 가졌으니 잘 쌓여져서 깊이 갈무리되었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등의 뜻을 가졌다고 할 수 있죠.

결국 온(蘊)이란 모여 쌓인 무더기란 뜻입니다. 따라서 오온(五蘊)이란 좁게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넓게는 세계(世界)를 창조ㆍ구성(構成)하는 다섯 가지를 의미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물질인 색온(色蘊), 감각인 수온(受蘊), 지각 또는 표상인 상온(想蘊), 마음의 작용인 행온(行蘊), 마음인 식온(識蘊)입니다만, 이 가운데 ‘색’은 현상계의 물질 전체를, 수, 상, 행, 식은 정신세계를 포괄합니다. 

다시 말해 책상 위에 책이 있다고 할 때 무언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식온’이고,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책인 ‘족장 세르멕’이라고 느끼는 것이 ‘상온’이며,

재미있다는 느낌이 ‘수온’,

더 읽고 싶어 책을 들춰보는 행위가 ‘행온’의 작용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감정이나 상을 짓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어떤 과정일 뿐입니다.


결국 무아(無我)는 ‘나’라는 존재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말이지, ‘과정으로서의 자아’를 뜻하는 ‘나’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아라는 것은 결국 영원불멸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 상주(常主)론과 죽으면 끝난다는 단멸(斷滅)론을 버리고,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을 긍정하는 중도설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진심을 찾는 일과 도망친 유녀를 찾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보는가?” 


업과 윤회

앞에서 스몰린이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의 연기법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지요. 이 말이 옳다면 사람도 사물도 모두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사건의 흐름’에서 동일성을 찾을 수는 없지요. 여기에 동일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들이 천천히 변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윤회가 문제가 되는 부분은 불변의 자아나 영혼이 없는데 무엇이 윤회하는가, 입니다. 사실 이런 논의 자체가 세상을 존재 중심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오는 것이죠. 그렇기에 윤회 역시 동일성과 연속성에 관한 문제로 생각해야 됩니다. 

연속성이란 죽음 후에도 마음 작용이 지속되어 새로운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동일성이란 사람이 윤회를 한다면 금생의 삶을 사는 사람과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류 신경과학계에서도 마음은 두뇌신경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반응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신경과학자들도 마음을 하나의 과정이라고 본다는 것을 뜻하는 거죠. 결국 신경과학자들은 마음을, 물리학자(스몰린의 견해)들은 물질을 ‘모두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는 셈’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오직 사건의 흐름만 있을 뿐인데 이 흐름을 밖에서 볼 때 이것은 물질로 나타나고, 같은 흐름인데도 안에서 볼 때 이것은 마음으로 나타난다.’ 라고 말이죠.


다만, 스몰린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물질만은 실체를 갖고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윤회는 무엇인가?

여기에 답하는 것이 불교의 업(業, Karma) 설입니다. 


업(業)이란 인도계 종교, 특히 베다철학(힌두교)에서의 인과율 개념입니다. 원래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서 인과(因果)의 연쇄관계에 놓이는 것이며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행위는 그 이전의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미래의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인도의 힌두교 사회에서는 어떤 특정의 카스트에 태어난다는 것도 그에 상응하는 전생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업의 뜻을 제한적으로 사용해서, 본인이 마음먹고 지은 행위(사건)만을 업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지어지는 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쨌든 저지른 행동은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가 아뢰야식(阿賴耶識, 우주만물의 근본, 또는 종자)이라고 하는 특별한 곳에 저장 됩니다.


이것을 종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식물의 종자가 싹이 트는 것처럼 업의 인과적 결과에 언젠가 싹이 튼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뢰야식에는 업의 종자 말고도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습니다. 업의 종자를 비롯해 아뢰야식에 저장된 정보들은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이 ‘흐름’은 끊임없이 현세에서 내세로 이어지는데, 업은 이 흐름을 조직하여 유기체를 만들었다가 흩어지면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는 거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입니다. 


사람들은 윤회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에 어긋나면 믿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유는 이런 것이죠.

‘기억은 두뇌가 하는 일인데 두뇌가 생기기 전인 전생의 일을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임사체험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연구한 과학자들이 뜻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윤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대표적인 과학자로서는 이안 스티븐슨(1918~2007)을 꼽을 수 있죠. 이 사람은 버지니아 의과대학 석좌교수로 있던 유능한 과학자인데 3000여 명의 사례를 분석하여 윤회에 대해 부정하기 어려운 과학적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책으로도 출판했는데,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지은 업대로 되는 것이라면 사람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을 강조하는 겁니다.

뭐든 원인 없는 결과는 없지만 수행을 통해서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붓다는 무조건 자기 가르침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법을 검증하고 확실히 이해한 뒤에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신해행증(信解行證)입니다. 


신해행증

신해행증이란, 불도수행(佛道修行)의 기본과정을 요약해서 이르는 말입니다. 신해행증이라는 말을 풀이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신(信): 먼저 붓다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2 해(解): 그러나 맹목적으로 믿으면 독단과 독선이 되죠. 잘못하면 맹신에 빠지는 광신자가 될 위험이 있는데, 이 점을 붓다는 처음부터 경계했습니다. 그렇기에 성인의 가르침이라도 그것이 이치에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 확인 작업이 해(解)입니다.

3 행(行): 붓다의 가르침이 옳은지 확인하고 나면 가르침대로 수행에 들어갑니다.

4 증(證): 바르게 수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 이것이 증의 뜻입니다. 


분명한 것은 윤리 도덕이 모든 수행의 기본이고, 마음을 안정시켜 깊은 선정에 들지 않고서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붓다는 말합니다.

“말하고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정을 닦으라.”

“방일하지 않고 선정을 닦으면 최상의 행복을 성취하리라.”

“삼매에 들지 못하면 진리를 알 수 없다.”

“세상에 망상을 좋아하면 제어가 없고 삼매에 들지 못하면 지혜가 없고, 숲에 홀로 살면서 방일하다면, 그는 죽음의 세계에서 피안으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윤리 도덕의 실천과 꾸준히 마음공부를 하면 때가 되었을 때, 새로운 정신세계에 들 수 있다고 붓다는 가르칩니다. 이렇게 했을 때, 7년 수행이면 충분하다고 붓다는 말합니다. 


불교사상의 시대적 변천

아무리 종교창시자의 가르침이 신성시되더라도 그 가르침의 이해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의 인지가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종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 종파와 교파가 만들어집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죠.


인도의 불교는 교리해석의 차이나 특징에 따라 대체로 초기불교, 아비달마불교, 초기대승불교, 후기대승불교, 밀교의 다섯으로 분류됩니다.

물론 붓다의 교설을 각각 다르게 해석하지만, 모든 종파는 그해석의 뿌리를 붓다의 가르침에 두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요. 


초기불교는 붓다 입멸 후, 약 100년간을 말합니다. 이때는 아직 붓다와 직속 제자들의 가르침이 살아 있어, 교리 해석에 문제가 없던 시절이죠. 

하지만 이후 점점 보수적인 장로들과 진보적인 젊은 비구들이 교리해석에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만, 장로들의 교단을 상좌부(上座部), 젊은 비구들의 교단을 대중부(大衆部)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 또는 교단이 나누어졌다고 해서 부파불교라고도 합니다. 이 시대에 각 부파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하고 정교한 교학체계를 이루어서 각 부파에서는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 Tripitaka)을 완성합니다.


아비달마 불교는 열반(涅槃)을 증득하여 아라한(阿羅漢)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자연히 출가자 중심의 교단이 되어 대중교화에는 소홀했습니다. 

그렇기에 교계의 한 편에서 붓다의 원래 뜻대로 대중과 함께하고 대중에게 진리를 전파하려는 불교의 참된 정신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대승불교의 시초입니다.


대승불교인들은 열반을 증득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오직 대중의 고통과 함께하며 대중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가운데 인격수행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 정신에 맞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붓다의 전생인 보살(菩薩)에서 찾습니다. 

보살의 정신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위로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보살의 수행 목표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측면으로 표현한 불교교리)이며, 보살의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붓다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큰 수레에 비유하여 대승(大乘)이라 불렀고, 열반을 증득하여 아라한을 추구하는 아비달마불교를 작은 수레라는 뜻으로 소승(小乘)이라 불렀죠.


이 때 대승불교에서는 대중교화의 취지에 맞게 대승경전을 새롭게 편찬하는데, 그 경전들이 <반야경>, <법화경>, <십지경>, <화엄경>, <유마경>, 등입니다. 


지금까지 붓다라고 하면 석가모니 붓다 하나만을 뜻했지만, 보살사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붓다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자연히 다불(多佛)사상이 따라옵니다. 그렇기에 대승 경전에는 여러 명의 붓다가 출현하죠.

대승불교는 기원후 2세기경 제2의 석가모니라 불리는 용수(龍樹,150?~250?, 용수는 본명 '나가르주나(Nagarjuna)'를 한역한 것임)에 의해 공(空)과 중도사상의 교리를 정교하게 다듬어 기본철학을 확립합니다. 그리고 이 용수라는 사람의 학파를 중관학파라고 합니다.  



용수보살(나가르주나) 상


용수 이후의 대승불교를 후기 대승불교라고 하는데, 후기 대승불교인들이 그 교리를 정교하게 다듬다 보니 부파불교 이상으로 철학적 이론이 복잡하고 난해해집니다. 여기서 다시 대승불교를 대중이 가까이 할 수 있도록 7세기경에 실천적인 불교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밀교입니다. 밀교는 절대적으로 진실하며 파괴되지 않는 어떤 것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하며 경전을 탄트라(tantra)라고 칭하죠. 


밀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불교 교리를 대중이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론보다는 다라니, 진언, 만다라, 수인(手印) 등의 상징체계로 교리를 나타냅니다. 결국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불교를 더욱 종교답게 만드는데, 이 밀교는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교리상 대승불교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붓다는 처음 깨달음에 이른 후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문제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깨닫고 난 이후 자기가 본 세계를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붓다는 외쳤습니다.

“수종하고 신앙할 대상이 없으면 고통스럽고 타락하게 되지 않겠는가? 정법(正法)이 있어 나로 하여금 자각하게 하였으니 내 마땅히 그것을 존중하여 받들고 의지해 살아가리라.”

여기서 정법이란 연기(緣起)법을 말합니다. 


연기법 해설

연기란 “緣--->A를 원인으로 하여, 起--->B라는 결과가 초래된다” 라는 말입니다.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此滅故彼滅) 


이 가르침이 뜻하는 것은 모든 사물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물간의 상호의존성(연기)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1. 사물간의 인과관계, 즉 세상에 원인 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는 뜻입니다

2. 사물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즉, 사물은 다른 것 없이 독자적으로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고, 부분과 전체는 상호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이죠. 


사물이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뜻을 갖습니다.

세상엔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 스스로 존재하는 독립된 존재도 없고, 어떤 사물도 다른 것과 구분되는 그 사물 고유의 성질도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일체 사물에 자성(自性)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성이 없는 것을 초기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용수가 이를 깊이 정리해서 연기=무자성(無自性,실체없음)=공(空)이라는 등식을 세운 거죠. 


용수가 말했습니다.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나는 공(空)이라고 하네. 또 이것을 가(假)라 하고 또 중도라고 하네.”

이 말은 사물이 객관적인 실재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실체가 없어 내용은 텅 빈 것이며(空), 있다 해도 잠정적으로 그럴 뿐이고(假), 내용은 없지만 잠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중도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은 세상은 실재하는 어떤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과 과정들로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귀결됩니다. 


연기법이 일체의 사물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때 사물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다들 이 말에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이 쇠나 돌멩이 같은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려울 겁니다. 사건은 그 사건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돌이나 책상 같은 물건들은 다른 것들의 존재와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이런 견해를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연기법에 의하면 세상에 다른 것과 관계없이 고립되어 있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없습니다. 여기엔 하나의 예외도 없지요. 이 말은 곧, 우주는 전체가 그대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는 뜻이고, 바로 전일주의(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총합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이론)적 관점에서 우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법이 말하는 인과관계

종교든 학문이든 사람이 알고자 하는 것이 인과관계입니다. 그렇지만 인과율이나 인과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죠.

오랫동안 과학이나 철학에서 인정받는 것은 선형인과율(線型因果律)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고, 원인이 결과를 만들지만,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죠. 이것은 먼저로부터 나중으로의 한 방향으로만 작용한다는 말인데, 단일방향인과율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논리적으로 결정론에 이르게 되죠. 


하지만 연기법에서의 인과관계는 ‘이것’은 ‘저것’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했지만, ‘저것’ 역시 ‘이것’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서로 기대고 있는 짚단처럼 서로가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는 뜻이죠.

둘이 동시에 영향을 주고받으면 자연스럽게 둘 다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로 표현하죠.

그렇기에 연기적으로 얽힌 ‘이것’과 ‘저것’은 서로에게 작용하여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죠. 이런 관계는 중층으로 겹쳐있어,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고 하며 우주 삼라만상이 그물눈처럼 인과적으로 얽혀있다고 비유해서 제망찰해(帝網刹海)라고 하는데, 이것을 상호인과율(相互因果律)이라고도 합니다. 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선형인과율에 대비되는 개념이죠. 


하지만 불교에서도 선형인과율이 폐기되어야 할 개념은 아닙니다.

불교도 인과응보나 인연과보와 같이 국소(局所)적 사건을 말할 때는 선형인과율로 세상사를 설명합니다. 세상일을 국소적으로 볼 경우엔 이해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호인과율과 선형인과율은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상호보완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연기법은 불교 교리의 핵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의 원인이자 또한 결과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제1원인이란 없다고 봅니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신을 상정하지도 않습니다. 불교 경전에서도 신을 말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저 신통력 있는 생명체일 뿐이죠. 불교는 오직 정법(연기법)만을 인정하고 정법에 따라 살 것을 말할 뿐입니다.

연기법의 표현은 간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팔만대장경으로도 모자

랄 정도로 그 의미가 깊고 오묘합니다. 


사실 현대과학도 연기론을 바탕에 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의 양대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비롯해, 제3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복잡계이론, 그리고 진화론, 유전학 등도 사물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간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또한 모든 물리적 존재와 그 운동을 관계론 적이고 사건중심으로 기술합니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물체의 운동은 시공간의 모양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런데 시공간의 모양은 물질의 분포에 의해 결정 되죠. 즉,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운동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음으로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됩니다.


진화 역시 생명체와 환경과의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유전자도 마찬가지죠. 유전자가 생명체의 특질을 결정하지만 일방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둘이 서로 영향을 받는 거죠.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생명체와 유전자도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후성유전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생태계의 상호의존성

연기법은 일체의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연기법 자체는 객관적 진리입니다. 연기법의 객관성에 대해 붓다는 말했습니다.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어떤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은 상주(常主)요, 법주(法主)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자각하여 연기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연기법이 객관적 진리라면 연기법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의 타당성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은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에 대해 자연보다 더 설명을 잘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요. 미국 최초의 환경보호운동단체인 시에라클럽(The Sierra club)을 창설한 생태학자 뮤어(John Muir, 1838~1914)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것을 따로 끄집어내려고 할 때, 분명한 것은 우주만물 삼라만상이 그것에 걸려 딸려 나온다는 사실이다.”


생물과 식물은 서로 먹이사슬에 의해 얽혀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체는 암석이나 광물 등 모든 자연에 영향을 주게 되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태양이 방출하는 에너지에 의해 생명활동이 이루어집니다. 우주 역시 전체가 긴밀하게 연기적으로 얽혀있는 겁니다. 


생명체가 탄생하고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와 함께 탄소, 산소, 질소, 철 등,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92가지의 원소가 모두 필요합니다. 생명체의 몸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의 유기물과 미량의 무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기물은 모두 탄소를 중심으로 수소, 산소, 질소가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이들 중 수소만 태양계 내에 있던 것이고, 다른 원소는 태양계 밖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탄소를 만들어내려면 태양 질량의 3배가 되어야 하고, 철을 만들려면 10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별들은 큰 중력 때문에 별이 내부로 수축하면서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수소와 헬륨을 융합하여 탄소부터 철까지 차례로 무거운 원소를 만들고 초신성이 되어 폭발합니다. 그리고 이 폭발로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지는데, 폭발이 일어날 때 별은 이 원소들을 우주공간으로 날려버리고 죽어가는 거죠. 


식물이 죽어 썩으면 비료가 되고 이 비료를 이용해 다른 식물이 자라듯, 지구상의 생명체는 태양계 밖의 무거운 별의 죽은 잔해 위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초신성의 잔해가 생명의 씨앗이자 생명이 자라나는 토양인 거죠. 이처럼 우주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 된 단일체이며 인간이란 지성체를 만든 것 또한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이렇게 ‘나’와 우주 전체에 적용됩니다. 


인과관계와 세계관

선형인과율에서는 결과를 만드는 원인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고 동일한 조건에서는 항상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행불행도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봐야겠죠. 


중국의 사마천도 역사를 기술하다가 악인이 잘 되고 어진 이가 고난을 겪는 일이 너무 많음을 보고 사기(史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도대체 천도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사마천 역시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식의 선형인과율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듯 인과관계가 원인에서 결과로, 한쪽방향으로만 영향을 미친다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선형인과율은 결정론에 귀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주에서라면 삶에 큰 의미가 있을 수 없겠죠.

그러나 인과관계가 상호적이라면 세상은 더 이상 기계가 아니고 삶도 더 이상 꼭두각시의 놀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상호인과율로 맺어진 세상에서라면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고 삶은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기에 세상 일이 아무리 꼬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엄정한 질서와 법칙이 있고 사람이 정도를 걸어야만 최고의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단순한 윤리강령이 아니라 종교인 것입니다. 


선형인과율과 세계관

단일방향으로 작용하는 인과율(선형인과율)의 개념을 가진 종교와 철학에서는 제1원인을 찾게 됩니다. 인간이 행불행이 원인 없이 일어난다면 모르되 원인이 있다면 거기엔 궁극적 실재가 무엇이냐 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 궁극적 실재를 ‘신’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신’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야겠죠. 만약 그것이 물질(돈)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삶의 행복을 위해 부귀영화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행불행의 근원을 인과관계에서 찾는다면 유신론이든 유물론이든 실체론은 모두 논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우주의 운행원리엔 ‘신’이나 ‘돈’의 개념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엠브로즈 비어스(1842~1914)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란 지극히 부당하게 한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유명한 물리학자 칼 세이건도 이런 말을 했죠.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신이라고 한다면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정서적인 만족을 주지 않는다. 중력의 법칙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기도나 종교 행위에 대해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기계론적인 선형인과율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말이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유신론의 입장에서 세상을 설명하려면 결정론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은 인격을 가져야겠죠. 인격신이라면 자신에게 예배하면 축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성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신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고, 소설가 헤밍웨이는 “모든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무신론자다.” 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들 까지도 대부분 선형인과율을 절대적 진리로 믿어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호인과율과 세계관

불교의 선승들도 뜻을 세우거나 결심을 할 때 불보살에 그 뜻을 고하고 108배나 3,000배를 하면서 기도를 올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뜻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고, 아상(我相)을 끊고 겸손한 마음을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이유를 보면 연기법의 이치로 볼 때 꼭 비합리적이고 허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정한수를 떠 놓고 북두칠성을 향해 기도하는 어머니까지, 모두 기도의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위에 나오는 앰브로스 비어스의 말처럼,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려면 신이 우주의 법칙 중 하나를 무효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정성껏 올리는 기도는 결코 허망한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 자신의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정성이 지속되면 주위사람을 감동시킵니다. 기도하기 전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되죠. 게다가 냉정하게 자신을 살피게 되면서, 자연스레 지혜가 싹트게 됩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올린 후 생각지도 못했던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이 말해주는 기도의 힘이요, 효과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자와 그 대상인 마음과 주변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 만드는 효과인 것입니다.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고 해서 누구나 똑같은 효과를 얻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상호작용의 효과가 복합적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보답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가도를 올렸다면 보답을 받은 자가 보답을 받고서도 그 효과를 깨닫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어쨌든 그 사람의 마음은 많이 지혜로워지고 정화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와 주변사람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효과는 단일방향으로 작용하는 선형인과율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중아함경의 도경을 보면 붓다는 강력한 어조로, 세상일은 숙명적으로 미리 결정된 것도 아니고, 우연에 의한 것도 아니며 신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설합니다. 세상일은 연기적 관계에 의해 내부적인 인(因)과 외부의 조건이 만드는 연(緣)에 따라 일어나며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여기에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상호의존성과 상호인과관계는 연기법이 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들로서, 이 특징들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든, 과학적 관점에서 보든, 시간이 흐르거나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연기법이 불변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연기법이 불변의 진리라는 가정 하에 연기법을 극으로 밀어붙이면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이치에 도달하게 됩니다. 법계연기란 이 세상 사물이 모두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는 것으로서 ‘생사 즉 열반’과 같은 의미입니다. 


법계연기

우주만유 전체를 하나의 큰 연기적 관계라고 보는 연기사상에 법계연기가 특별한 점은, 이 현상세계를 진리 자체인 법신불(法身佛, Virocana Buddha, 비로사나불, 毘盧舍那佛)의 나타남으로 본다는 데 있습니다.

법신은 진리를 인격화한 眞理佛로서 붓다의 生身에 상대해서 일컫는 말이며, 수행의 결과로서 실현되는 行佛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렇게 존재하는 진리로서의 理佛입니다. 


사실 세상 만물은 이중성의 특성을 지닙니다.

중생-부처, 번뇌-보리, 생-사, 물질-정신, 음-양 같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물이나 개념들도 그 근본을 찾아 들어가면 하나의 뿌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 말은 이중성이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양자역학의 미시세계에서 입자-파동이라는 성질을 갖는 것에서도 볼 수 있죠.


그러나 사물의 이중적인 본질이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화엄사상가들은 이를 낮이 밝더라도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둡게 보이는 것에 비유합니다. 

범부는 세상에서 온갖 종류의 차별상을 봅니다. 범부가 차별상을 보는 이 법계는 미혹의 현상계죠. 이 미혹의 현상계를 사법계(四法界)라고 합니다. 사법계를 미혹의 현상계라고 하는 것은 범부가 보는 세상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업이 만든 매트릭스라는 뜻입니다.

이런 세계에 사는 범부는 외부세계가 실재하는 세계라는 착각 속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서산대사(1520~1604)는 84세 때인 입적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80년 전에는 그것이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그것일세.”

80년 전엔 ‘그것’이 ‘나’의 주인으로서 내가 ‘그것’에 끌려 다녔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범부는 차별적인 면만을 보게 됩니다. 


이렇듯 미혹의 세계에 살던 범부가 눈을 떠 사물의 실상을 알게 되면 그는 우주 만유에 공통된 통일성, 즉 공(空)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진공묘유를 직역하면, ‘참으로 비우면 묘하게 있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진공’과 ‘묘유’라는 명제(命題)는 별개의 것이 아닌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空’(비움)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有’(있음)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일체 모든 것(五蘊=色·受·想·行·識)은 그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건(因緣)에 의존된 것이므로, 실체가 없는 공무(空無)한 것임과 동시에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없고(無我), 너도 없으며(無人), 우리도 없고(無衆生), 영원함도 없는(無壽者) 연기의 법칙 속에 오직 진실의 완성인 원만실성(圓滿實性=妙有)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에 망령된 생각이 없으면(心無妄念) 그대로 ‘진공’이며 ‘묘유’이기 때문에 일여(一如), 즉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삶의 원동력은 행복에 있지 않고 고통에 있습니다.

그리스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BCE497~BCE406)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필록테테스의 입을 통해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뱀에게 물린 상처가 없고,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불행과 이 섬에서 겪어야 했던 처절한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마치 짐승처럼 생각도 없고 근심 걱정도 없었을 것이다. 고통이 내 영혼을 휘어잡아 깊은 고뇌에 빠뜨린 후에야 나는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이 말은 우리네 인생여정의 진정한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난과 시련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좋은 물건을 구할 때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성공을 위해서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죠. 뛰어난 사람들이 이루어낸 업적엔 그들의 쓰라린 실패에 뿌리를 둡니다. 그들의 성공은 어려움과 실패라는 밑거름 위에 이루어진 것이죠. 고통은 누구나 싫어하지만 고통이 없다면 삶에 특별한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기에 윤리 도덕 또한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을 말할 때 항상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하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어진마음(仁)의 근원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불쌍한 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고통이 없다면 자비나 사랑의 개념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수치심이 없으면 의(義)라는 것도 없게 되죠. 무례한 것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없으면 예(禮)도 없습니다. ‘그른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으면 옳은 것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지(智)도 없습니다.


고통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즐거움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진선미를 추구하고 달성하는 데 있다면 인간의 가치는 고통에서 옵니다. 진선미의 근원은 고통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통에도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 다는 것, 이것이 연기의 이치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여기 자신의 상황에서 하나도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가 완전하다는 것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양자정보학과의 블래트코 베드럴(Vlatco Vedral, 1972~ )교수는 그가 쓴 <물리법칙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자(電子)라는 것도 다른 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특정한 행동을 기술하는 어떤 명칭이다....불교에서 얘기하듯이 우리는 그 물체가 가지는 어떤 성질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양자 물리학은 그런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과 크게 일치하는 점이 있다.” 


연기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계 이론 등, 과학 분야를 통해서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연기법의 실체 없음, 즉 무상과 무아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은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선형적 세계관(상호적 세계관이 아닌)이나 존재중심의 세계관(사건중심의 세계관이 아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위의 블레트코 베드럴 교수의 말도 그런 부분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작 물리학자들도 양자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양자역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닐스 보어도 “양자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이론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아인슈타인 역시 양자역학을 강의하고 나서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내 말을 이해했다면 내가 양자역학을 똑바로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라고 말했으며,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양자역학 앞에서 이토록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나 중도사상처럼 사물의 실재성에 대해서 놀랄 만큼 닮았기 때문입니다. 

일반 대중들이 과학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는 것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폴 데이비스(1946~ )는 “현대의 많은 작가들은 양자론에서 사용한 개념들이 선(禪)과 같은 동양의 신비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라고 말 할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양자역학적 지식이 있으면 불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양자역학과 불교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BCE 515?~ BCE ?)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라고 하여 존재의 유무를 명확히 정의했습니다. 그에게 무(無)란 없는 것이기에 사유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사유는 오직 유(有)만을 대상으로 하는 데, 이것은 ‘사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에게 존재를 위한 이성적 사유는 진리를 찾는 최고의 수단이었죠. 이런 생각은 이후 플라톤에게 이어지면서 이성을 중시하는 그리스 철학은 서양의 합리주의 철학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붓다의 설법은 그 표현과 의미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다....여래는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한다.”

<둘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不一亦不異>라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는 일반적인 논리나 이성적 사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입자-파동의 이중성

일상적 경험세계에서 볼 때 세상은 객관적 실재로 이루어졌고 사물들은 인간이 이분법적 사고에 꼭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물을 음-양, 주-객, 유-무, 선-악, 삶-죽음, 실재-허상 등 대립되는 개념으로 나누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형식논리에 바탕을 둔 이분법적 사고는 고전물리학의 철학적 기반이었고, 뉴턴의 고전역학 역시 이런 사고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 초,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물리학자들은 원자 이하의 미시적 세계에서 뉴턴역학에 바탕을 둔 고전물리학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고전물리학에서 말하는 입자(粒子)와 파동(波動)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요. 

입자란 실체가 있는 알갱이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입자는 아무리 작아도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죠. 이것은 객관적 실재로서 다른 모든 물질과 마찬가지로 관찰자와 무관하게 거기 그렇게 존재합니다.

이에 반해 파동은 진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물결 파나 공기와 소리(음파)의 관계를 좋은 예로 들 수 있죠.

물결 파는 물이라는 매질이 진동하는 현상이고, 음파는 공기나 물 또는 고체와 같은 물체가 진동하는 현상입니다. 진공 중에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음파를 전달하는 매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죠. 


물이 없으면 물결파가 존재할 수 없지만, 물결파가 없어도 물은 존재하듯이, 파동 없이도 입자는 존재하지만, 입자 없이 파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파동이란 실체 없는 몸짓을 가리키는 가명(假名)일 뿐인 거죠.

파동이 합쳐지면 간섭(干涉)이 일어납니다. 파동의 간섭이란 두 개의 파동이 만나서 합성파를 이룰 때, 파동의 만나는 상황에 따라 합성파의 세기가 각각의 파동의 세기를 합한 것보다 강할 수도 있고 아예 합성파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파동과 입자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몇 가지의 성질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차이를 알기 쉽게 구분해봤습니다. 


입자: 1.서로 떨어져 있어 개수를 셀 수 있음. 2.공간상의 일정한 위치에 머물러 있어 가두어 둘 수 있음. 3.운동량을 갖고 있어서 다른 물체를 튕겨낼 수 있음. 4.간섭현상이 없음. 5.입 자들이 갖는 총 물리량은 개별 입자들이 가진 물리량의 합과 같음. 6.실체가 있음. 


파동: 1.연속적이어서 셀 수 없음. 2.허용된 공간 전체를 채울 때까지 퍼져나가기 때문에 가두 어 둘 수 없음. 3.운동량을 갖지 않기에 다른 물체를 튕겨내지 못함. 4.간섭현상이 있음. 5.파동의 총 세기는 개별 파동들이 갖는 세기의 단순한 합과 다름. 6.실체가 없음. 


전자나 빛, 또는 원자 같은 것들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가려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실험하고자 하는 대상을 가늘고 길게 찢어진 두 개의 틈(이중슬릿)으로 통과시켜 그 뒤의 스크린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이때 밝고 어두운 무늬가 교차하면 간섭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은 파동이 틀림없습니다. 입자는 간섭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중슬릿 실험으로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힌 사람이 영국의 물리학자인 토마스 영(1773~1829)이었기에 이중슬릿 실험을 ‘영의 실험’이라고 합니다.

이제 영의 실험으로 빛은 파동이라는 100%의 증거를 얻었고,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흑체복사’와 ‘광전효과’ 와 같이 빛을 입자라고 봐야만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물리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리학자들은 빛은 파동이라는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이상하게 여겼을 뿐, 빛이 입자로 행동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죠. 


그러나 1923년 콤프턴(A. H. Compton, 1892~ 1962)이라는 물리학자가 ‘빛’이 다른 입자를 쳐서 튕겨내고 ‘빛’ 자신도 튕겨나가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발견으로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입자인 전자(電子)도 파동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심을 과학자들이 하게 됩니다.

그 뒤인 1927년, 미국의 물리학자 데이비슨과 거머가 전자를 세밀하게 다시 실험한 결과 빛처럼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현상을 확인합니다. 


이후 물리학자들은 전자뿐만 아니라 모든 소립자와 원자들도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마침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원자뿐만 아니라 1999년에는 수소 원자보다 크기가 5만배나 더 큰 풀러렌(주로 탄소 원자 60개가 축구공 모양으로 결합하여 생긴 버크민스터풀러렌을 말한다.)이라는 물질도 파동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뿐만이 아니라 전자와 같은 소립자는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거기에 더해 학자들은 더욱 경악스러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중슬릿 실험 장치로 미시세계의 소립자들을 쏘아 보낼 때, 실험자가 보고 있으면 입자처럼 간섭무늬가 없지만, 실험자가 보지 않으면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이것은 자연의 물질들이 관찰자의 개입으로 행동을 달리하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관찰자의 ‘의식’의 개입에 따라 사물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사물인식방식인 기존의 존재론적이나 인식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험을 거듭하면서 이것이 엄연한 자연현상이라는 것을 과학자들이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렇게 불가사의한 미시세계 입자들의 행동을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바탕으로 미시세계의 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새로운 역학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고, 1920년대에 물리학자들은 이 목적에 맞는 새로운 역학체계를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量子力學)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생사 즉 열반’이나 ‘범부 즉 부처’라는 의미를 현대 물리학적 용어와 개념을 빌려 표현하면 그대로 생사와 열반의 이중성, 범부와 부처의 이중성이 됩니다.

사실 이런 개념은 우리 인간의 지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붓다 역시 깨달은 뒤 논리적으로 자기가 본 사물의 이중성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기에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불교경전이나 논서에서는 ‘생사 즉 열반’이나 ‘색즉시공’ 과 같이 즉(卽)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때로는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사물의 참모습은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 언뜻 보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불교의 연기(緣起) 및 불이법 (不二法)과 음양 (陰陽)의 원리 그리고 현대과학의 이론에 입각해 볼 때, 전혀 모순된 말이 아니며 또 이것이 우주의 실상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런 표현은 결국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억지로 표현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발견된 것입니다. 


다시 공(空)의 개념

공(空) 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라는 것은 위에서 밝혔습니다.

이 공의 개념은 서방에서 나타난 허무주의와는 다르며 모든 것의 덧없음을 뜻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모든 것이 필요 없음을 나타내는 게 아닙니다. 모든 물질과 관념을 뛰어넘어 해탈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불교에서 공(空)은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대승 불교 계통에서 특히나 강조됩니다. 이는 존재가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데, 모든 것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아는 자아가 자성을 가지지 않고 공함을 말합니다. 용수의 중관학파는 심지어 붓다의 법(다르마)까지도 공할 뿐만 아니라, 공함 자체도 공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니야야학파 (용수<인도식 본명은 나가르주나>가 활동했던 당시 인도에서 번성했던 베다계의 여섯 학파, 즉 상키야학파, 요가학파, 바이쉐시카학파, 니야야학파, 미망사학파, 베단타학파 중에서 논리학과 인식론이 가장 발달했던 학파 였다)의 학자들이 그 논리의 부당성을 들어 용수를 공격합니다.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의 자성은 그 어디든 존재치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결코 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치 않는 자성이라면 개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라면서도 자성의 개념을 말한다면,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라는 그대의 주장은 파괴될 것이다.” 


이 말은 서양 철학사에서도 그 유명한 ‘러셀의 역설’로 불리는 논리적 모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용수는 여기에 대해 대답합니다.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을 ‘공성(空性)’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라는 내 말은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논의는 파괴되지 않는다.”


즉 '공'이란 모든 현상이나 사물이 그 효능이나 존재 면에서 허무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친절한 개념 제시만으로써 용수는 단박에 그들을 논박하고 맙니다. 




용수가 머물렀던 사원으로 알려진 인도 중남부 안드라프라데시 주 나가르주나콘다 유적지              출처 :  법보신문


용수의 해석, 곧 대승 불교 일반에서는 이처럼 공성이 연기를 설명하는 개념, 즉 연기성 그 자체가 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곧 집착할 대상 자체가 없음을 말하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중관사상은 공과 중도의 이치로써 사람이 어떻게 해서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지를 잘 지적하고 그릇된 견해를 논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 세계가 왜 사람들이 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현대 철학적으로 보면 공은 존재들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있다고 믿지만 이것은 나에 해당하는 영혼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부를 것을 우리가 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현대과학에서 원자의 대부분이 실제로 비어있다는 것을 공과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접근입니다. 


용수의 설명처럼 불교에서 공은 실제로 사물이 비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과학사회학이나 반실재론에서 말하듯이 원자를 비롯한 과학적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즉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게 그나마 올바른 접근 방식입니다.

그래도 옛날과 달리 원자의 구성요소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그나마 공사상의 내용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개념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논점에 대해 용수의 대표저작인 [중론]을 인용해보면 이렇습니다.

“누군가 근원적으로 실재하는 번뇌를 지녔다면, 어떻게 번뇌를 없애겠는가? 누가 근원적인 본질을 없앨 수 있는가? 누군가 근원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번뇌를 지녔다면, 어떻게 번뇌를 없애겠는가? 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없앨 수 있는가?” 

이것을 다시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음’을 자성으로 지닌다면 그 또한 다른 것을 자성으로 지니는 것만큼이나 모순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논점입니다. 


사실 이런 ‘양 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라는 전통은 원시불교 때부터 존재해왔습니다.

붓다 또한 '사람은 죽은 이후에 존재합니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존재한다고 하면 상견(eternalist)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견(annihilist)이다. 둘 다 바른 견해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거든요. 

용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자성이 없어 공하다’라는 주장은 즉 모든 것의 ‘성질’은 다른 것들과의 ‘연기적인’ 관계성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 스스로만으로 서는 성질을 성립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언어'는 그 성질 상 지칭하는 대상에 '자성'처럼 느껴지는 성질을 부여합니다. 이 언어를 잘 분석해보면 자성이 있다는 생각은 결국 어떤 경우에든 모순으로 귀결되고, 따라서 편리한 도구에 불과한 언어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으며, 이런 잘못된 견해가 뭇 중생을 고통으로 이끈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자전거 타기 비유

인도철학자인 권오민 교수는 불교사상을 ‘자전거타기’ 비유로 쉽게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내용을 여기 적습니다. 


일찍이 자전거를 보지 못했거나 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이는 먼저 그것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획득하고 그 이치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당장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실제적인 습득(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습득의 초기에는 자전거의 이치만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그 순간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반복하다 보면 이제 두 손 놓고도 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전거에 대한 인식은 필요치 않게 됩니다. 바로 자전거와 하나가 된 것이지요. 이제 자전거에 올라타기만 하면 그것에 대한 인식 없이도 바로 달릴 수 있습니다. 바로 자전거에 대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죠. 


이것을 들어 자전거 타는 법을 ‘깨달았다’라고 말한다면, 자전거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획득한 때는 ‘이해했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식의 궁극적 목적은 전자이며, 후자는 그에 이르는 수단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자를 종(宗)이라고 하고, 후자를 교(敎)라고 합니다. 전자가 주체적 실천적 종교적인 진리인식으로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객관적 사변적 과학적 철학적인 진리인식으로 이해를 본질로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존재의 실상에는 궁극적 측면의 실상과 언어적 측면의 실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 일반에서 전자가 피안(彼岸)이라면 후자는 그것으로 건너가기 위한 배에 비유됩니다. 또한 전자가 달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됩니다. 따라서 ‘종’이 ‘교’보다 높게 평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대승불교의 선종(禪宗)에서는 아예 참선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선종이 내거는 근본기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입니다. 


불립문자란 문자를 빌지 않고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문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문자에 집착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명제의 형식을 취하여 확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죠. 또 불립문자란 경전(敎)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곳에 불교의 진리가 있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교외별전이란 경전에 절대적 가치나 의의를 부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선의 생활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선종에서는 개인이 체험하는 선의 깊이와 높이를 직관하는 일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습니다. 그 개인이 체험한 선의 경지를 기(機)라고 하는데, 스승은 제자의 기를, 제자는 스승의 기를 곧바로 파악하여 그것을 여실히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지인심이라 합니다. 직지인심이란 자신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성품, 즉 불성(佛性)을 알아보는 것으로서, 이때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사실 선불교가 동양에서 힘을 얻게 된 것은 용수와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복잡다단한 논장(論藏)으로 인해 초기불교의 소박하고 단순한 힘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선불교의 불립문자는 그래서 이런 실용적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자정운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이 밖에도 불교 교리에는 수많은 논설과 가르침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 핵심사상인 공(空)사상을 현대물리학에 비추어 설명해봤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에 좀 더 가까워졌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참고문헌

물리학자 김성구 박사의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불광출판사.

인도철학자 권오민 교수의 인도철학과 불교, 민족사.

블래트코 배트럴 지음. 손원님 옮김, 물리법칙의 발견. 모티브북.

리 스몰린 지음, 김낙우 옮김, 양자중력의 세 가지 길, 사이언스북스.

이안 스티븐슨 지음, 송준식 옮김,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송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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