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가보는 거지
구억만리 떨어진 타지에서 살 집은 1년 치 월세를 선납하는 조건을 내세우고 나서야 겨우 성사됐기에 1년 치 렌트비를 일시불로 송금해야 했다. 지난 2년 전 고민 끝에 내린 결정, 그 결정을 믿고 추진해 오며 기다린 순간인데, 드디어 실현된다는 기쁨도 잠시, 막상 목돈을 송금하려고 하니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마냥 주저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겁도 없이 가족을 데리고 가긴 어딜 가?’
‘영어도 못하는데 가서 잘못되면 어쩌지?’
‘지금 포기하면 손해가 얼마지?’
하지만 내가 좋다고 설득해 가며 여기까지 왔기에 나보다 수십수백 배 더 겁이 날 와이프에게 차마 내색은 못하고 한마디 던져봤다.
‘우리, 잘하는 거 맞지?’
와이프도 마치 걱정하던 마음을 들킬세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해 주는데, 그 얼굴 표정과 대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잘해야지’
단 두 마디의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우리 부부는 다음날 바로 송금할 준비를 서둘러 마친 뒤 이 불안하기만 한 결정을 애써 기억에서 지운 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 얘기를 주고받으며 잠이 들었다.
이제 남은 기간은 두 달. 워낙 걱정 많고 급한 성격인지라 원하는 날짜의 항공권을 구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1월부터 미리 예약해 둔 항공권 덕분에 카운트다운은 반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 집을 계약하고 다시 검색해 봤을 때 항공권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올랐었으니 성격 급한 게 모처럼 한 건 한 순간이었다.
송금까지 마쳤으니 이젠 가장 먼저 부모님께 알려드릴 차례였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으나, 중년의 아들이 당신들 눈에는 여전히 철없는 아이로만 보이시는지 매번 걱정과 훈계를 달고사시는 부모님께서 이 일을 미리 아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지 불 보듯 뻔해 이제야 어렵게 말씀을 드리게 됐다.
역시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제사 얘기한 아들에게 서운한 내색을 숨기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시는 모습에 죄책감도 들었지만, 마음 한켠엔 이민도 아니고 고작 2년 갔다 오는데 이렇게 서운해하실 일인가 반항심도 생겼다. 그러고 보면 23년 전 입소 전날, 저녁에 ‘내일 군대 갔다 올게요’라고 갑작스레 통보하고선 혼자 훈련소에 갔을 때도 ‘잘 갔다 와라’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해 주셨던 부모님이 이렇게 연로하셨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세월, 참 빠르다.
우에 됐건 이미 엎질러진 물, 기분 푸실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으니 주변 지인들에게도 잽싸게 연락을 돌려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두 달간 매주 십 수 번의 송별회를 겪어보니 지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놀란 반응으로 시작했고, 이어서는 캐나다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한 궁금증, 캐나다에서 계획한 삶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본 뒤, 응원으로 끝나는 비슷한 레퍼토리를 보였으나, 그때 받은 모든 축하와 격려의 응원은 캐나다행의 큰 원동력 중 하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기한 점 하나는 ‘우리 이모가’, ‘내 동생이’, ‘내 친구가’, ‘우리 아들이’ 등등 이미 캐나다에 거주 중인 지인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지금 캐나다행을 추진 중이거나, 행동까진 이어지진 못했지만 추진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었는데, 이런 얘기들은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을 불식시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래, 내가 척박한 오지로 가는 것도 아니고,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뭐 어렵겠나. 함 갔다 와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