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막의 커튼을 내리며
캐나다에서 살 집의 1년 치 렌트비를 송금한 날부터 출국일까지 남은 기간은 단 2달, 그 2개월이라는 시간은 4인 가족의 한국 살림살이를 처분하고 캐나다에서 필요할 살림살이를 빠짐없이 준비하기엔 상당히 빠듯한 기간이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캐나다에 가져갈 물품을 정리해야겠다는 와이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캐나다행을 작정한 직후부터 1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카페나 블로그 등을 보며 취합해 둔 to buy list를 자랑스럽게 꺼내 보였고, ‘그럼 그렇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와이프의 핀잔을 들으며 리스트를 함께 검토하기 시작했다.
지금 집에 있어서 안 사도 되거나, 우리 가족의 생활패턴을 기준으로 사용빈도가 적을 물건, 로컬마트에서 큰 가격차이 없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을 리스트에서 지우고, 캐나다 현지에서 요긴하게 쓰일만한 물건, 현지에선 구하기 힘들 물건, 현지 가격이 한국보다 월등히 비싼 물건을 우선순위로 체크한 후 닥치는 대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퇴근 후엔 집안 살림살이 정리가 시작했는데, 택배상자에 넣거나 이민가방에 싸서 가져갈 극히 일부 물건을 제외하곤 냉장고, 세탁기, TV, 식탁, 수천여권의 책부터 각종 그릇, 멀티탭까지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을 죄다 처분해야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순서를 정할 것도 없이 손에 닿는 대로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팔릴만한 건 중고마켓에 떨이로, 팔기 애매한 건 나눔을, 나누기도 애매한 건 분리수거로, 분리수거도 안 되는 건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6개를 꽉 채워서 버렸으니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이고 지고 살았던 것인지 새삼 놀랍기만 했다.
짐 정리의 새로운 난관은 아이들 장난감이었다. 만들기를 워낙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며칠만 지나도 온갖 재료로 만들어진 창작물이 산더미처럼 쌓였기에 본인 손으로 직접 정리해서 버리는 습관을 길러왔다지만, 이번 정리는 다른 차원의 그것이었다.
어디선가 사은품으로 받아왔던 노란색, 핑크색 레디백을 8살, 5살 아이에게 각각 하나씩 쥐어주고 놀이방에 가득한 각종 교구부터 장난감을 포함한 모든 물건 중에 이 가방에 담기지 않는 건 다 놓고 가야 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 들어있던 장난감들을 전부 바닥에 쏟은 뒤, 며칠이 걸리든 너희가 직접 정리해서 버리라고 지시했더니,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장난감과는 마치 마지막 작별인사를 대신하듯 한 번씩 인형놀이를 하고선 하나 둘 버리기 시작하는데, 전부 정리하는 데까지 약 3주 정도는 걸린 것 같다. 중간중간 버리기 싫다거나 더 가져가면 안 되냐고 투정 부릴 때마다 ‘먼 길을 갈 땐 눈썹도 놓고 가야 하는 거야.’ 라며 수시로 일깨워줬다. 나중엔 애착인형들까지 쓰레기통에 넣길래 깜짝 놀라서 괜찮겠냐고 물어보니 자포자기한 듯한 아이들의 대답.
‘눈썹도 놓고 가야 하는데 뭐’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팔고, 버리는 순간에도 비워진 방에 택배박스를 쌓아놓고 선편택배 포장을 진행했다. 해운이사 업체를 이용하려던 애초의 계획이 고생 좀 하더라도 비용을 절반 이상, 무려 수백만 원을 절감할 수 있는 우체국 선편택배로 직접 발송하는 걸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우체국 선편택배 포장은 일반 택배 포장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데, 개별 박스의 사이즈 제한은 물론 최대 20kg의 무게제한까지 맞춰야 했기 때문에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혹시나 무게가 약간 초과되는 건 괜찮을까 싶어 우체국에 물어보니 우체국 저울 기준으로 단 1g이라도 초과되면 내용물을 빼서 무게를 맞춰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10g, 5g의 단위까지 체크하며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책이 이렇게 무거웠나? 몇 권 넣지도 않았는데 15kg을 훌쩍 넘는다. 심지어는 평소엔 무게가 있기나 했을까? 생각했던 수건 한 장 조차 무려 몇십 g이나 된다.
겨울옷과 침구류를 완충재 삼아 아이들이 볼 전집 몇 질, 식자재, 의약품, 문구류, 주방용품 등을 포장했는데, 막판엔 완충재로 쓸만한 물건이 소진되자 아이들이 버리기로 정리했던 봉제인형들이 완충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나중에 캐나다에 도착해선 아이들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선편택배 포장의 백미는 수십 수 백 g씩 남는 자투리 무게를 라면과 믹스커피를 하나 둘 넣어가며 오차 없이 19.9kg 이상의 무게로 알차게 포장을 마무리하며 느낀 희열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포장한 상자가 무려 29박스나 됐고, 무게로 580kg 상당의 짐을 용달을 이용해 우체국으로 옮겨 발송까지 마치고 나니 말 그대로 큰 짐 덜어낸 기분이다.
모든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쓰레기조차 말끔히 비워진 텅 빈 집으로 돌아오니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집안 곳곳을 거닐며 빼놓은 물건은 없는지 서랍하나하나까지 확인한 뒤, 전등을 하나 둘 끄고 나왔던 건 정들었던 집을 구석구석 쓰다듬어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작별인사를 마쳤는도 불구하고 현관문 앞에서 선뜻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는데, 서서히 닫히는 현관문을 커튼 삼아 조금씩 가려져가는 어두운 거실 복도가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발을 옮길 수 있었다.
마치 인생 1막이라는 무대 가운데 서 있던 나를 비추는 조명이 하나 둘 꺼지고, 각본 없는 인생 2막 준비를 위한 2년간의 인터미션(Intermission)의 시작을 알리는 커튼이 끝까지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야 퇴장하는 뮤지컬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