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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참치

by SM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대치동에 있던 시기이니 대략 2008년이나 2009년 쯤이 아닐까 싶다.


와이프가 회사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고 끝나는 시간이 얼추 맞아서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각자 너무 바쁜 시기라 둘이 식사 한 번 제대로 하기 어려운 때라 좀 여유로운 식사를 하고 싶었다. 어떤 메뉴와 식당을 갈지 고르던 중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회사 근처에 유명한 참치횟집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설마담은 참치회를 좋아한다. 너무 좋아한다. 좋은 메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소주도 한잔 곁들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영업을 하는 대치동 '몰타참치'라는 소문난 참치횟집을 찾았다. 사실 들어갈 때 참치회라는 메뉴가 기본적인 가격대가 있으니 조금 비쌀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를 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참치 저녁코스 9만원!


메뉴를 같이 보자마자 설마담과 눈이 마주쳤고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너무 비싼데…'

다시 또 눈이 마주쳤다. '어쩌지…'


급기야 설마담이 종업원에게 먼저 운을 뗐다. "저...단품요리는 없나요?"


뭐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아 간단히 술 한잔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치려는 노력이었으나 그러기에 우리 둘의 표정은 너무나 굳어있었고 당황한 상태였다.


종업원은 무심하게 "네~ 저녁에는 코스만 하고 있습니다" 라고 답을 했다. 결코 우리를 비웃으려는 말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귀에는 "여기 손님 많아서 단가 낮은 단품은 없으며 돈 없으면 빨리 꺼지시라'라고 들리는 듯 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설마담이 의자를 뒤로 끌어 일어났다. "간단하게 먹어도 될 것 같은데...딴데 가보자"


그 짧은 5초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스친듯하다.

'학생도 아니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회사원이 된 지금 이렇게 망신스럽게 물러날 것인가?'

'하루 쯤은 근사한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서로 너무 바빠 이야기할 기회도 많지 않은데, 와이프가 멀리서 우리 회사 근처까지 와서 오붓하게 식사를 하게 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아픈 기억으로 망칠수야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내 의자는 뒤로 당겨져 엉거주춤 일어난 상태였고 "그치...좀 헤비한 것 같긴 해"하고 화끈거리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식당밖으로 도망치듯 달려나왔다.


그리고 그날 설마담과 그 이후 어떤 식당을 가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과감하게 식사 한끼 지르지 못한 자괴감이 남아있고 우리는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야 이런 정도의 식당에서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펼쳐보며 가격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최고가의 메뉴를 시켜 먹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만이 우리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큰 부담이 되더라도 그냥 식사를 하고 나올 껄하고 생각하지만 당시 보통 식사 한끼 가격이 4-5천원이었으니 9만원이면 한 20배짜리 식사를 하는 셈이었으니 너무 부담이 되는 금액인 것만큼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정도 돈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다른 가치는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잠깐의 쪽팔림을 무릅쓰고 식당을 빠져나온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합리적인 행동인것은 맞다.


그로 부터 세월이 벌써 십 수년 흘렀다.


우리에게 그날의 아픔(?)은 이제 하나의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어 마치 가난한 시절의 일화처럼 미화할 수 있는 수준은 되는 듯하다. 공교롭게 그 뒤에 또 근처 사무실이 있는 Dow에 일하게 되어 여러 차례 내게 아픔을 줬던 몰타 참치에 방문할 수 있어서 이제는 좋은 기억도 남은 식당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20끼 식사에 맞먹는 돈을 쓸 만큼 배포가 크지도 않고 부자가 되지도 못했다. 이제는 미리 가격을 보고 식당에 들어가는 현명함을 갖추었을 뿐.


어떤 식당이든 가격표 안 보고 들어가는 그 날이 올까?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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