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돌아가셨다.
잘 모르는 분이다.
기억속에 몇 년 전에 한국오셨을 때 세월호 유가족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신 분이라 무조건 좋은 분이었을 것 같아서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다.
난 천주교 신자 비스무리한 사람이다.
사실 어릴 때 신부님을 보좌하는 어린이 복사(服事)를 역임!!한 바 있고 심지어 결혼도 해운대 성당에서 혼인미사로 치뤘으니 비스무리 정도는 아니고 상당히 발을 들였다고도 할 수 있다.
초등학교때 성당을 등떠밀려 나갔다. 엄마가 두 형제가 주말에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는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아침에 형하고 나하고 굳이 성당에 보냈다.
대충 시간을 때우고 왔다. 엄마한테 받아온 헌금으로 떡볶이 사먹고 땡땡이 치고 놀다 온 적도 많다. 그럴 때는 항상 주보 내용을 토대로 오늘 신부님이 어떤 강론을 하셨을 것이라는 스토리를 짜서 집에 갔다. 혹시 엄마가 물어볼까봐. 적어도 이야기를 짜깁기하는 역량은 그 과정에서 상당히 키워졌을 것 같다.
초등 5학년 쯤에 몇 년 성당을 (뜨문뜨문) 다니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약간의 자괴감 같은 게 생겼다. 성당에는 미사 중간에 신부님께 작은 밀떡을 받아먹으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소위 영성체라고 절차가 있다. 세례를 받지 않은 나는 그 시간에 신부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그 때 신부님께 밀떡을 받아먹으러 가는 아이들이 꽤나 멋있게 보였고 부러웠다.
(샛길로 잠깐 빠지면 이 작은 밀떡이 영어로 Wafer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웨하스'라는 과자가 wafers이고 또 반도체 동그란 기판도 wafer이다. 모두 같은 단어를 쓴다)
그래서 6학년이 되던 해 나도 세례를 받으리라 마음을 먹고 교리 공부를 하러 다녔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끌려서 엄청나게 열심히 교리 공부를 했다. 몇 주 동안 새벽 미사를 꼬박꼬박 나갔고 오후 교리 공부도 빠짐없이 다녔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세례를 받았다.
내 세례명은 (사도)요한이다. 왜 그렇게 지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아마 그때 다니던 성당 수녀님이 그거 하라고 지어 주신 것 같다. 그때 세례명을 좀 신중하게 지었더라면 그게 내 영어 이름이 되었을텐데 아무래도 내 얼굴과 이미지하고 John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결국 난 세례명을 영어이름으로 쓰지는 못했다. John은 내게 서부의 총잡이 같은 이미지가 있는 이름이었다.
암튼 그렇게 성당에 열심히 다녔더니 수녀님께서 내게 신앙의 싹이 보였는지 아니면 신부님으로 성장 할수 있는 가능성을 보셨는지 (그로 부터 불과 2년 뒤 중학 2학년때 플레이보이 잡지를 돌려보다 걸려서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갔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 점은 나를 완전히 잘못 보신 것이다.) 내게 '복사'를 하라고 권하셨다.
뭔가 그럴듯한 빨간 가운 같은 예복을 입고 신부님 옆에서 보좌하면서 미사 전에 초를 켜고 미사 중에는 '댕~'하는 종을 치는 모습이 동네 평신도 어린이와는 달리 말 그대로 좀 우월한 느낌이 드는 자리였다. 그런 역할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대단히 자랑스러웠고 영광스러웠다.
정확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독서실 총무나 강의실 조교 같이 아주 약간 권위가 있는 것 같고 다른 학생이나 애들보다 또 약간 우위에 있는 그런 것이었다.
몇 달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로 부터 몇 달 뒤였다.
토요일 오후 미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사 전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예복으로 갈아입고 다른 복사 친구 한 명과 함께 사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사 직전에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이 복사의 큰 역할 중 하나 였기 때문에 대기실에는 성냥통과 불을 옮겨 붙일 수 있는 긴 심지 같은 게 있었다.
그 유엔 팔각 성냥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불을 붙여서 성냥이 꽂혀 있는 성냥통 안에 있는 성냥 머리에 붙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호기심이 생겼다.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 불을 붙여서 슬그러미 유엔 팔각 성냥통 가운데 성냥 머리에 갖다 댔다.
'펑'
실제 소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거의 폭발음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순간 성냥통 위로 불이 솟구쳤고 내 앞머리를 홀라당 태울 정도 였다.
재빨리 옷으로 덮어 껐으나 사제대기실 카펫 일부가 검게 그을릴 정도로 상당한 화재가 있었다.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덜덜 떨렸기 때문에 불은 다 꺼졌으나 계속 거기 있을 수는 없었다.
황급히 집으로 도망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뒤로 성당을 나가지 못했다.
나중에 그 성당 다니는 친구로 부터 들은 얘기는 나를 추천했던 수녀님이 나를 찾더라는 것 (나를 걱정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사고치고 도망친 것에 대한 분노인지 알수 없다)과 내가 불장난했던 사제대기실 아래 보일러실이 있어서 하마터면 성당 하나를 홀라당 태울 수도 있었다더라는 얘기였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 일로 인해 내 신앙생활을 그것으로 마무리 된 셈이다.
사실 난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라서 설혹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때는 입시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아예 엄두를 못 냈고 대학 들어가서 어설프게 마르크스 유물론을 읽을 때는 종교가 '사기'에 가깝다고도 생각했다.
가령 기독교는 2000년 전에 남보다 좀 착하게 살았던 그리고 남보다 좀 생각이 앞섰다가 여러 정치적이유로 박해 받고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이고 그걸 인류의 절반 가까이가 가스라이팅 당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죽은 어떤 사람을 칭송하고 돈을 내고 그 사람이 말한 것(그도 분명치 않은)을 교리로 공부하고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적도 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신을 믿지도 않고 종교도 없고 교회에 나가지도 않지만 종교가 가지는 사회에서의 순기능 그리고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효능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고 있어서 배척하거나 배타적인 입장은 아니다.
앞으로 내가 종교를 가질 일은 없겠지만 각자의 입장에 맞게 그게 무엇이든 어떤 측면이든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금 보다 더 나아지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된다면 존중하고 지지하고 찬성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종교는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일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명복을 빕니다.
SM